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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영성 영어 블로그 번역

우리는 실수를 하면서 살아간다. - 어느 예수회원의 글

by 봄날들판 2015. 4. 22.

우연히도 곧 성소 주간이라서 그런지 이 글이 눈에 들어옵니다.

성소자는 아니지만, 저자의 글에 공감 가는 게 꽤 있네요.

헌신과 결정의 문제, 성소 결정에 관한 한 예수회원의 글.

 

우리는 실수를 하면서 살아간다.

Mistakes Were Made

 

에릭 임멜 ERIC IMMEL, SJ on February 3, 2015

 

나는 손글씨가 참 엉망이다. 내 손글씨는 마치 발발이개 꼬리에 연필을 하나 달고서 종이 위에 내달리게 한 것하고 비슷하다. ‘I’자는 ‘Z’자하고 비슷하고 ‘g’자는 마치 ‘s’처럼 보인다. 마치 잭슨 폴락 서체와 같고 우스꽝스러운 엉망진창이다. 논술 시험과 손으로 쓰는 편지는 나의 파멸에 원인이 된다.

새 학기가 시작되니 이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철자법은 어떨까? 으흠, 손글씨하고 별 다를 바가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두 단어의 철자를 계속해서 틀린다는 것이다. 헌신(commitment)i 뒤에 t를 두 번 써서 committment라고 쓰곤 하고, 결정(judgment)g 다음에 e를 넣어 judgement라고 쓰곤 한다. 방금 두 단어를 타이핑할 때 워드프로그램의 자동교정 기능으로 철자 오류가 수정되었다. 나는 철자 오류가 자동수정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헌신은 모든 밀레니얼 세대(미국에서 1980년에서 2000년 사이 태어난 세대를 일컫는 말)에게 반영웅적인 말이고, 결정은 그중 많은 이가 두려워하는 일이다. 두 단어의 필체와 철자를 엉망으로 쓰는 일 역시 두려운 일이지만, 실제 삶에서는 그것을 자동 교정해 주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

 

8년간이나 나는 성소 식별 과정을 거쳤고, 결국은 그 끝에 예수회에 입회했다. 그것은 올바른 식별이었다. 하지만 수련소 문으로 들어올 때 거기에 이르기까지 부정적인 여정이 전혀 없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겠지. 나는 실수를 한 적이 있다.

 

나는 점잖은 사람이었다. (또한 그런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자기 일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헌신하며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술을 조금 마시거나 그 중간쯤이 되면 밤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그리고 혼자서 하느님에게 말씀드리곤 했다. “당신은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십니다. 저는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이 고요한 순간에 관해, 다른 때는 소란스러운 내적 삶 가운데서 분명하게 보이는 작은 점 같은 순간에 관해 아마도 족히 기백 명에게 말했을 것이다.

 

한편으로, 나는 내게 쏟아지는 관심이 좋았다. 성소 식별 중인 사람에게는 격려해 주는 분위기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결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면 어쩌면 두려운 것인지도 몰랐다. 아무한테라도 말하면 모든 사람이 나에게 일종의 해결책을 주겠지 하며 자신을 납득시켰다. 그렇지만 그 효과는 좀 사그라졌다. 여하간에 나는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이런 내 말에 지지를 표현하는 사람도 있고, 참아 주는 사람, 들어 주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얼마 가지 못했다. 그들은 하나둘 결혼하기 시작했으며 아이를 낳고 나이 들어 갔다. 달랑 혼자만 남을 위험에 처하자, 나도 그들과 똑같은 것을 찾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한 사람 찾았는데, 헌신하지 못하는 나 때문에 그녀는 결국 피해자가 되었다. 관계를 끝내고 싶은 핑계거리로 세상에 불을 놓고 싶다고 갈망을 말하고는 다음 해에 애매모호하게 행동했던 것이다. 매몰찬 방식이었다.

***

 

2010년 가을에 나는 크레이튼 대학교에서 대학생 피정 지도를 도왔다. 피정 동안 전국에서 모인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지지하는 편지들을 받았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멋진 친구이자 훌륭한 남자이고, 재능 있고 믿음이 깊으며 활기차고 연민의 마음이 있는데다가 다정한 사람이에요.’ 나는 그 말에 감사하면서도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나는 이 사람들을 속임수에 넘어가게 한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메모가 하나 있었다. 활기차고 깔끔하게 여성스러운 필체로 손으로 쓴 글이면서도 글쓴 이의 펜과 종이에 결정의 분위기가 뚝뚝 떨어졌다. 사랑의 마음으로 깨끗하게 쓴 그 메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에릭, 당신 시간을 낭비하는 일을 그만두세요. 제 시간을 낭비하는 일도 그만두시고요. 예수회에 입회 신청을 하세요.”


그녀는 나의 잘못을 알고 있었다. 나는 자신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 같았다. 갈팡질망하는 삶이라는 안전한 지대를 빼앗긴 것 같았다. 몇 년간 벤치 신세만 지다가 등판하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또한 자유롭고 가벼워진 듯했다. 그것은 내가 구해 온 초대이자, 내가 필요로 하던 쿡 찌르기, 혹은 떠밀기였다. 그것은 실수가 아니었다. 때가 되었다. 나는 올바르게 판단을 받은 것이고, 유일한 응답은 헌신하는 것이었다.

 



***

 

결정은 헌신은 낳고, 헌신이 있을 때 결정이 나온다. 또렷하고 명쾌한 그 메모는 실제 결정을 향하도록 가리켰다.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었지만 헌신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어두운 길로 나아갔다. 아무 문제 없는 듯이 계속 살아왔지만, 내 안에는 두려움, 슬픔, 분노, 절망, 수치심이 있었다. 그런 것은 황폐함으로 이어질 뿐인데 말이다.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원했다. 혹은 어쩌면 잘못된 것을 원했다. 그 때문에 공허함만을 남기는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느님은 내게 다시 위안(consolation)을 주셨다.

 

Ken Untener 주교가 쓰고 순교자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에서 영감을 준 기도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을 때 해방감을 느낍니다. 그 해방감은 어떤 일을 할 수 있게, 그것을 매우 잘 하게 우리를 이끕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 우리는 모든 이가 될 수도 없다. 헌신을 할 때 우리는 어떤 것은 잃는다. 그렇지만 그 상실은 우리가 선택한 것을 온전히 할 수 있도록, 우리가 되어야 하는 존재가 온전히 되도록 자유를 준다.

 

나는 자유로이 서약했다. 결정을 통해 구원을 받았으며 기쁨의 가능성이 들어 있는 삶이자 성소를 봉헌했다. 나는 여전히 ‘committment’와 ‘judgement’라고 써서 철자를 자꾸 틀린다. 하지만 좀 나아지고는 있다.

 

헌신은 나에게 여전히 쉽지 않다. 나는 결정하고 결정을 받는다. 글씨를 쓸 때나 사도직을 할 때나 실수를 한다. 좋든 싫든 그런 실수 역시 나의 일부분이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항상 더 많은 게 있다. 한 친구와 노트 하나. 나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 나의 이야기를 쓰도록 돕고 그것을 계속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너그러운 사람들, 사랑이 한없으신 하느님, 무한히 헌신하시고 내가 좋은 사람이 되도록 결정하신 분.

 

피에르 드 샤르댕 신부가 말했듯이 나는 우여곡절과 행운과 작은 사고와 저지른 잘못과 나의 흠결을 축복합니다. 나는 나 자신을 지금 내게 주어진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합니다.” 나는 거듭거듭 예전 일을 돌아보고 실수라는 참된 선물을 바라보며 지금 내 모습 그대로 나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