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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영성 영어 블로그 번역

<인사이드 아웃> 리뷰 : 어느 수사님의 리뷰

by 봄날들판 2015. 8. 11.
<인사이드 아웃> 리뷰 : 어느 수사님의 리뷰

데이비드 로메로David Romero, SJ

Hearts in Need: Practicing Presence & Embracing Reality

제목이 이것인데 번역해도 안 어울려서 그냥 간단하게 지었습니다. 번역이 까다롭네요.. 아 ㅜㅜ
영화 리뷰도 좋지만 그 아래 나오는 예수회 수사님과 한 소녀의 이야기가 더 마음에 와 닿네요.
아직 영화를 안 보았는데, 얼른 보러 가고 싶네요.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면 뭔가 도움이 될 만한 대답을 못 해 주어서 안타까울 때가 있는데, 이 말처럼 그냥 옆에 있어 주는 게 때로는 가장 좋은 것 같아요.
원문 출처는 미국 예수회의 수사들이 운영하는JESUITPOST.ORG라는 사이트입니다.

출처는

https://thejesuitpost.org/2015/07/hearts-in-need-practicing-presence-embracing-reality/

제이슨 도너가 남긴 <인사이드 아웃>의 멋진 영화 리뷰를 읽고 나니 그 영화를 꼭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꼭 내가 픽사의 왕 팬이어서는 아냐. 난 감동을 주는 분위기를 언제나 좋아하니까. 그 증거로 내 친구들이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거야.


영화 줄거리를 좀 볼까. 열한 살 소녀 라일리는 미국 중서부에서 샌프란치스코로 이사를 오는데, 영화에서는 의인화된 감정들이 어린 라일리가 이런 어려운 변화를 거치면서 다시금 예전의 즐거운 꼬마가 되도록 돕기 위해 어떻게 힘을 합치려 하는지 보여 줘. 의인화된 감정은 기쁨이 이끌고 슬픔, 버럭, 까칠, 소심이 나오지. (기쁨하고 슬픔이 감정 콘트롤 본부에서 사라진 후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봐. 그다지 좋은 조합이 아닌 버럭, 까칠, 소심하고만 남으면 어떻게 될까!)

제이슨이 잘 설명했듯이(이분이 리뷰 썼다고 하는데 그거 말하나 봅니다.) 이 영화에서는 감정이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내리락해. 그래, 여기저기 가니까 그래서 다는 아니더라도 많은 이가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어. 그렇지만 이런 감정이 왔다갔다하는 여정 말고도 몇몇 장면이 있어서 쉴 수 있게 잠깐 휴식 시간을 주지. 다음에 일어나는 일 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미리 알아챌 수 있어.

(스포일러가 있으므로 안 본 분들은 건너뛰세요. 아, 나도 안 보았는데... )

특히 나한테 기억에 남는 순간은 라일리의 어린 시절 상상 속 친구인 빙봉이 무척 슬퍼할 때야. 빙봉이 라일리가 어렸을 때의 일들을 하나씩 잊는다는 걸 깨달았거든. 그녀가 그 기억을 잊으면 빙봉마저 사라지게 돼. 기쁨은 항상 활기차고 긍정적이고 명랑한 성격인데, 빙봉을 기분 좋게 하려고 항상 최선을 다하지. 그렇지만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었어. 그러고 나서 놀라운 일(적어도 나한테는 그랬어!)이 일어나. 슬픔이 빙봉 옆으로 가서 그가 마음이 어떤지 그냥 들어주지. 슬픔은 빙봉 옆에 있어 주기만 해.기쁨이 그런 것처럼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하지 않았어.

슬픔은 안아 주고 어깨를 내어 주며 기대어 울게 해. 그리고 그게 꽤 효과가 있었어. 그리고 기쁨은 그 모습에 무척 놀라워해. 그리고 기쁨 또한 슬픔이 빙봉에게 대하던 식으로 관심을 기울이도록 초대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슬픔이 기쁨에게 그런 말을 해. 빙봉이 얼마나 슬픈지 알기 때문에 귀담아 들어준 것이라고. 그렇게 해서 그녀가 마음으로 걱정한다는 것을 빙봉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고.슬픔은 우선 귀담아 듣고 빙봉의 슬픔에 함께해 주려고 한 거지. 아마도 슬픔은, 고통과 슬픔을 더 건강하게 헤쳐 나가려면 그 방법이 더 보탬이 되리란 걸 알았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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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짧지만 아름다운 순간을 보면서 마닐라에서 올해 초에 만난 사람이 떠올랐다. 작년부터 나는 샌프란치스코 대학교의 대안 연구 해외 프로그램인 카사 바야니한Casa Bayanihan으로 필리핀에 머물렀었다. 나는 대학교 학생들과 일하는 것 말고도, ‘아이들을 위한 다리’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마닐라의 매우 가난하고 어려운 지역에 사는 가족들과 함께할 기회가 있었다. 주로 하는 일은 공동체 안에 있는 작은 교실에서 교사들이 하는 일을 돕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섯 살배기 한나를 보았다. 울면서 자신이 고통을 꾹 참고 있다는 것을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던 한나를 보았다.

직원들과 함께 점심을 마치고 나서 아이들이 무슨 놀이를 하고 있는지 보러 센터 밖으로 나갔다. 둘러보던 내 눈에 한나가 우는 모습이 보였다. (한나는 항상 차분하고, 귀엽고, 다소 조용한 편이었다.) 한나는 언니 뒤에 서서 훌쩍대고 있었는데, 언니는 다른 아이들과 함께 한참 놀이에 푹 빠져 있었다. 한나의 한 손에는 돌이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언니의 머리 위로 던져 버릴 기세였다. 한나를 화나게 한 일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그렇지만 모습을 보니 금방이라도 펑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때 다른 아이들은 새로운 춤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한나는 울면서 돌맹이를 더 꼬옥 붙잡고서 언니 뒤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런데 나한테 이상했던 것은, 한나의 언니가 뒤를 돌아보고는 동생이 울면서 그녀를 향해 돌을 잡고 있는데도 전혀 무서워하는 듯 보이지 않았다는 거다. 눈껌쩍도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도 그런 상황을 알아채기는 했지만 그 일로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한나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 모든 일이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나서 나는 번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달려가서 아이가 손에서 돌멩이를 내리게 해야겠어. 한나를 기분 좋게 해서 문제를 해결해야지.’전체 상황이 불편하게 느껴질 때면 대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려고 움직이기 전에 나는 한나와 눈이 마주쳤고 우리는 그냥 서로를 바라보았다.

마치 주변의 모든 것이 일순간 멈춘 듯이 느껴지는 때가 있지 않은가? 그때가 그랬다. 그 순간 어떤 의미에서 그녀가 자신의 연약한 자아 전체를 나누어 주고 있는 듯이 그녀와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사랑이 가득한 슬픔과 연민의 표현을 통해, 그녀가 그것을 느끼기를 바라면서 나의 온 자아를 그녀에게 나누어 주었다. 어떤 고통을 느꼈길래 그렇게 아파하는 것인지 나는 상상할 수 없었다. 아마도 그녀는 다만 그녀의 아픔을 누가 알아주기를 바랐던 것이 아닐까.

그래도 여전히, 나는 한나가 실제로 그 돌을 던질 생각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전체적인 상황이 몹시 신경이 쓰였고, 반응해야겠다고 느꼈다. ‘이리 와서 기분 좋게 해 주는’ 태도로 해결하기보다는 나는 말없이 다가가 한나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다정하게 돌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아이가 돌을 내려놓을 때까지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마치 영원이라도 되는 듯이 길게 느껴졌다.

— — — — —

그때 한나가 어떤 방법으로도, 비록 그 일 직후에 모두 치유되었다고 하더라도 고통이 사라졌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때가 내가 ‘어떻게 당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나요?’라고 묻는 순간이다. 그러고 나서 내가 하는 일은 주변을 돌아보고 나서 어려운 대화를 회상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 아이, 겨우 다섯 살의 아이에게서 그 화의 아래에 고통과 분노가 느껴졌다. 그 장소에서 하느님이 부르시는 것 같았다. ‘여기에 있는 나를 알아보겠느냐? 이곳에 나와 함께 있으면서 이 고통을 나와 함께 견디겠느냐?’

문제를 해결하자는 식의 태도를 썼더라면 과연 먹혀 들어갔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 편을 선택했더라면 그녀에게 이런 식으로 말했을 것 같다. “네가 지금 어떻게 느끼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너는 지금과 다르게 생각해야 해.” 그녀는 내 말에서 그녀가 어떻게 느끼는지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꼈을 것이고, 내가 스스로 기분이 좋아지게 하려고 그녀를 ‘고치려고’ 했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말이다. 이건 내가 거듭거듭 들어야 하는 말이라서 일깨우는 것이다. 그것은 나와 관련된 게 아니다. 그것은 내 안의 유일하고 반복될 수 없는 선물에 관한 것이다. 그녀는 고쳐지기를 바란 게 아니다. 다만 인정받고 환영받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생각이 든 적이 많다. 상대방에게 따뜻한 보살핌으로서 자기 자신을 내어 주기 위해서는 우리는 관계적 존재로서 자신이 누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진리를 깨닫기를 갈망해야 하고 또 그럴 필요가 있다. 그리고 기분 좋을 때뿐만 아니라, 마찬가지로(어쩌면 더욱) 마음이 우울하거나 고통스러울 때도 말이다. 불편하고 부정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에 나만의, 혹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서 곧바로 빠져나가려고 한다면 자신의 실재를 실재가 아닌 것으로 만들고 만다. 그래서는 더 깊은 치유의 작업이 충분히 이루어지기가 거의 어렵다.

더 깊은 초대는 말 그대로 그녀와 함께 고통을 견디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불편한 마음을 이겨내고, 고통을 겪을 때 우리를 가까이 잡아 주시는 사랑하시는 현존이라는 진리를 신뢰하면서 그녀를 함께 잡아 주라는 초대이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할지, 어떻게 행동할지 알지 못할 때에도 옆에 함께 있어 주라는 초대이다. 어쨌든 할 말을 잃고 있는 것은 고통받는 이에게 편안할 수도 있다. 그 사람 역시 그렇게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을 테니까.그리고 그것은 그 사랑을 결코 잊지 말고 그것을 살아내며 그 은총의 이끄심으로 삶을 살아가라는 초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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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와 함께 돌을 잡고 있을 때 나는 문득 마음이 깨지며 열리면서 넓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느낌에서 하느님이 우리 둘을 붙잡고 계시다고 느껴졌다. 그 거룩한 생명이 우리 안에 살기를, 우리의 현실의 구렁텅이에서 최종 결정권(final word)을 가지시기를 바라시는 게 느껴졌다. 그 말씀은 인간의 실재, 곧 깨지기 쉽고 나약하며, 치유하시는 현존과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에 처해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그 말씀은 우리가 있는 곳 어디에서나 우리를 만나 주시며, 우리 가까이 있기를 바라시며, 우리가 그 친근하고도 부드러운 사랑과 배려를 깨닫기를 바라시며, 먼저 우리에게 귀 기울이시고 먼저 우리를 잡아 주시는 말씀이다.

그 말씀에는 이런 사랑의 언어가 담겨 있다.

나는 너와 함께 있다.

   내가 너를 위해 있다.

      우리는 이 일을 함께 헤쳐 나갈 거야.

         너는 혼자가 아니야.

이 말은 아무리 힘겨워도 돌을 내려놓도록 용기를 주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