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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모아 보자

문득 반짝였던. 김상용 신부님

by 봄날들판 2016. 6. 18.

필요한 게 무얼까 생각해 보니 이야기다. 

이론이나 설명이나 성찰보다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 

그 이야기에 나도 귀 기울이고 싶어졌다. 

일단은 여기저기서 모아놓자.  

모아 놓다 보면 뭐가 되어 있겠지. 


첫 글은 김상용 신부님 글인데

도입부에 경당 가실 때의 그 느낌에서

개인 피정 갔을 때 혼자 여기저기 다니다가 

빼꼼하게 성당 문 열고 인사하면서 들어갈 때의 기억이 

떠올라 옮긴다. 뒷부분은 여전히 이해가 안 가지만.  




"문득 반짝였던"

-예수 성심 성월에 부쳐-

 

나는 일주일 가운데 가장 좋은 날이 주일 오전이다. 우선 늦잠을 잘 수 있어서 좋고 공동체가 무척 고요해서 좋다. 함께 사는 수사님들이 거의 대부분 주말 사도직을 위해 이날은 공동체 밖으로 파견을 나가있는 시간대이므로, 집이 여느 때 보다 두드러지게 조용한 까닭이다. 고백하건대, 어떤 날은 세수도 하지 않은 채 공동체 경당으로 가서 그곳에 깃든 설명할 길 없는 선한 기운으로 오히려 잠이 깨어 빙그레 감실을 향해 한번 미소 짓고는 아침 기도를 일갈하였다고 밑도 끝도 없는 자부심으로 조간 신문을 들척일 때가 많다. 오늘도 나는 경당에 앉아 이 고요를 즐겼다. 간혹 창문 밖으로 골목길을 질주하는 경박한 오토바이 소음 조차도 혹은 동네에서 하릴없이 농담 삼아 말장난을 하는 어린 아이들의 칭얼거림 마저도 선명한 삶의 리듬으로 넉넉히 느껴줄 수 있는 여유가 이 고요 가운데에는 자연스레 생겨난다. 나는 고개를 들어 경당 창문 밖, 이제는 제법 그 이파리의 연두색을 짙여가는 담쟁이의 생장을 살핀다. 건듯 불어오는 수도원 마당의 바람결에 잘게 흔들리는 이 담쟁이의 잎을 경당 안의 창문 틈으로 바라보는 것은 묘한 즐거움과 더불어 마음 속 저 깊은 곳까지 시원한 생명의 기운을 느끼게 할 만큼 매력적이다. 긴긴 겨울을 이기고 다시 그 생동의 약진을 하는 이 신비스런 기운은 도대체 어디에 기인하는 것일까. 나는 한참 이 담쟁이잎의 생장에 주목하다가 문득 한결같이 나를 응시하는 경당 감실에 시선이 가 멈춘다. 붉은 감실 등이 어쩌면 저렇게 한없이 차가울 수 있는 금속성의 감실 장식과 잘 어울릴까. 나는 무릎을 꿇고 아침 성무일도 가운데 독서기도를 펼친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St. Cyril of Alexandria) 주교의 요한복음 주해가 독서로 나와 있다. 나는 늘 하던 대로 나의 기도 소리가 분향과도 같이 경당에 은은히 흘러가도록 소리를 놓아 준다.


“지상의 가장 지고한 은총은

이미 우리 마음 안에 심어진

사랑의 아름다움,

곧 예수 성심에 스민

하느님 시선과의 일치를

열렬히 구하는 가운데

얻어질 것이다.”


나는 예수 성심에 대해 이제 저 감실 안에 ‘영원한 신비’로 숨쉬고 계신 지존하신 숨결에 내 마음을 가 닿게 하는 기도를 한다. 그리스도의 거룩한 마음은 한 영혼이 어떠한 비참한 궁핍의 순간에서조차도 절망하지 않도록 영혼을 일으키는 마음이다. 영혼을 진작시키는 이 힘은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의 완전한 성심의 상처로부터 기인한다. 그리스도께서 처음으로 당신의 성심을 인류에게 열어 보이신 사건은 세례자 요한과의 만남이 아니었을까. 광야를 거쳐 흘러 드는 요르단 강가에서 이 역사적인 두 인물이 대면했다. 한 사람은 인간들의 회심을 독려하기 위해 세례를 베풀고 있었고, 다른 한 원초적 인간은 죄 없음에도 오히려 인류와 연대하기 위하여 죄인의 대열에 잠자코 끼어 들었다. 세례자 요한의 낙타 털옷 가까이에서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는 맨몸 이셨다. 처음으로 하느님의 숨결이 인간 요한에게 전달되기 시작했다. 이 박동은 우주 삼라 만상의 발동적 근거이며 창조세계의 가장 맏배에 불어 넣어졌던 그분의 기운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예리한 창에 찔려 물과 피를 이 땅에 적실 어린양의 가녀린 숨소리도 함께 들려오고 있었다. 세례자 요한은 두근거렸다. 성심의 숨결에 연동되어 그 박동에 동기화 되어본 영혼들만이 간직한 일치의 황홀이었다.


“우리가 바로 이 박동으로부터 생겨 났군요?” 요한은 물었다.


성심께서는 말없이 함께 약진하는 세례자 요한의 숨소리를 들으시고는 미소를 지으셨다. 당신을 알아 본 영혼들에게 말씀은 침묵하시지만 어디 이게 음가 없는 묵언이랴. 결국 그리스도의 성심은 물 속에 깊이 잠기셨다. 이것은 박동의 멈춤이며 찰라의 죽음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숨결의 멈춤이다. 이 멈춤은 인류의 모든 형태의 죽음을 의미한다. 이때, 거룩하고 찬란하며 환희에 찬 새로운 숨결이 물 속 저 깊은 곳에서부터 들려온다. 도저히 희망 할 수 없는 이 숨결의 모든 소리들이 잠식되어야 할 저 깊은 물 속 한 가운데에서 아직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태초의 박동이 용솟음 친다.


나는 예수 성심께서 물 위로 오르시기 전에 기도에서 깨어났다. 나는 다시 고요한 경당 안이다. 주위에는 연두의 이파리로 나풀거리는 창문 너머의 담쟁이가 여전하며, 멀어져 가는 아이들 고함 소리도 아련하다. 문득 영혼이 반짝인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