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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영성 영어 블로그 번역

어느 수사님의 묵상> 소모에서 벗어나는 삶 (새해 결심과 중독)

by 봄날들판 2017. 1. 12.
Called Out of Consumption
소모에서 벗어나는 삶 (새해 결심과 중독)
글쓴이는 에릭 임멜 수사님,
번역자는 나.
새해가 시작되었는데요, 올해는 거창한 새해 결심을 세우지 않고
진짜 작은 것만 세웠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 작은 것만 지켜도 엄청 성공이겠더라고요.
그나저나 그 작은 것에는 번역을 많이 하자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빨리할까 생각했는데 일단 구글 번역(--;;)에서 돌린 다음에
번역했더니 확실히 시간이 줄어드네요. 물론 표현을 그대로 두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새해 결심에 대단한 거 세우지 말고
이 수사님처럼 중독적인 것 한두 개만 줄여도
올해는 성공한 거라고 봅니다.
내 안에서 무감각을 감각으로 어느 정도 바꾸기만 해도 성공한 거라고 봐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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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에는 기차나 버스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했을까?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내 부모님이나 시카고에서 오래 산 토박이들에게 물어보면 답을 얻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하는 것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머리를 숙이고, 엄지나 검지 손가락은 작게 빛나는 스크린 위를 쉴새없이 왔다갔다 한다. 눈은 소셜 미디어나 캔디 크러쉬의 끊임없는 물결에 고정되어 있다. 나는 그런 식의 고립주의에 빠지지 않으려고 하지만, 더블탭해야 할 인스타그램 사진이 있을 때는 나도 남들과 다를 바가 없다.

여느 때와 같은 수요일 오전 7시 5분, 나는 일터로 가려고 157번 버스를 타고 있었다. 보통 그 시간대는 사람이 별로 없다. 나는 뒷자리에 않아 생각하는 것 말고는 다른 것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손에 커피를 든 채, 깨어나는 도시가 나를 깨운다. 하지만 그날은 유독 버스에 엄청나게 사람이 많았다.

‘버스에는 내가 앉을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운동복을 입은 청년 옆에 섰다. 사람이 많아서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두 사람 다 플라스틱 손잡이를 꽉 잡았다. 이어 버드를 한 그는 전화를 꺼내 불꽃에 뛰어드는 나비처럼 거기에 시선을 못박았다. 그가 가진 스마트폰은 내가 본 중에 가장 화면이 컸다. 그래서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화면에서는 두 남자가 서로 얼굴을 때리는 장면을 보여 주는 짧은 비디오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다.

마치 월스트리트 주식 시세 표시처럼, 비디오는 쉴새없이 빠르게 계속되었다. 정식 권투 시합장에서 치고박는 장면이 보였는데 그것보다 더 어둡고 위험한 영상도 있었다. 골목길이나 지하실에서 격렬하게 싸우는 남자들, 피에 굶주린 군중들, 파이트클럽, 갱단 기선, 뭔가 문제가 생긴 하우스 파티 등등,,, 청년은 아무런 감정 없이 비디오를 소비했다. 내가 무척 가깝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뭔가가 내게 말해 주었다. 이것은 하루의 많은 시간에 그가 하는 일이라고, 얼굴이 계속 박살나고 박살나는 장면을 계속 보는 것 말이다. 그가 언제부터 그런 종류의 폭력에 편안해졌는지 나는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버스에서 자동음성 안내가 흘러나왔다. “라살레, 라살레에서 청색 지하철로 갈아타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살짝 위로 올려다보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겨울잠 자던 곰이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 같았다. 그는 내려서서 도시 속으로 사라졌다.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

여러 이유 때문에 나는 스물하나가 되기 전에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았다. 주로 무서워서였다. 그러나 그 찬란한 나이에 이르자, 모든 두려움은 사라지고 잃은 시간을 채워 나가기라도 하듯 술을 마셔댔다.

술은 대학 동아리 동료들에게 배웠는데, 필름이 끊길 때까지 빠르고 무모하게 마시고, 흑역사도 만들고, 물담배도 피우고 소리도 지르고 그랬다. 다음 날이면 아침 식사 자리에서 어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해 내려고 애쓰면서 웃어 댔다.

처음으로 술에 잔뜩 취한 날은 술에 취해 있다는 몽롱함이 새롭고 참신해서 놀라웠다. 마침내는 그 느낌은 평범한 것이 되었다. 술 마시는 일과는 내 삶의 일부가 되었다. 술에 취해 집에 들어가고, 지미 존스 술집에서 엄청나게 마셔대고, 물을 큰 컵으로 서너 잔을 들이킨 다음 이부프로펜 두 알을 먹고 잠이 들었다. 몇 년 동안 일주일 동안 며칠을 그렇게 살았다.

그런 생활은 결국 문제를 일으켰다. 때때로 나는 흐리멍텅한 눈과 약간의 두통을 안은 채 출근했다. 때로는 학부를 졸업하여 교육자가 받는 낮은 월급으로 버는 돈보다 더 많이 돈을 썼다. 더 정신이 맑을 때 할 수 있는 일들, 예를 들어 글쓰기나 독서, 하루를 마치고 친구와 전화로 이야기하는 일을 할 시간이 없었다.

몇 년 후 나는 우선순위를 조정했다. 그리고 과거에 얼마나 기회를 많이 놓쳤는지 깨달았다. 어느 눈이 펑펑 쏟아지는 밤에 나는 친구들과 아파트에 콕 박혀 있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친밀감이 깊어진 그때의 기억은 아지랑이 같은 행복한 기억 속에 가려져 있지 않다. 지금은, 술을 다 끊으라는 초대가 희미해져 있다. 때때로 시원한 맥주 한 잔이나 위스키 한 잔에 나 자신을 내어 주고 싶은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소비가 바뀌기를 원한다. 술 마시고 난 다음 안개가 걷히면 내 안에서 삶을 극적으로 다시 바꾸어야겠다는 필요를 느꼈었다.

***

나는 아름다운 것에 눈먼 사람이 되어 갔다. 미시간 호수에 해가 뜨는 모습을 볼 때마다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든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게 거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늦은 밤이면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 화면을 바라보다 마침내 반쯤 지쳐 스마트폰을 내려놓는다. 예전만큼 길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리고 버스에서 사람들과 그리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그러나 그 남자의 전화 화면에 나오는 폭력의 영상들에 나는 좀 놀랐다. 나는 그에게 일깨워 주고 싶었다. 그들은 서로를 상처 주고 있는 겁니다, 라고 말이다. 나는 어떻게 보면 지금은 나의 소비로 인해 생긴 무감각함에서 멀어지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나는 느낌이 내가 좋아하는 느낌이 아니더라도, 그것을 완전히 다시 느끼고 싶다. 나는 최근의 대통령 선거로 인한 고통과 두려움, 또는 시카고가 여전히 폭력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 베를린이 결코 예전 같지 않고 알레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고 싶지 않다. 그것들이 내 머리에서 조금씩 잊히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많은 이가 새해 결심을 세운다. 나는 이제 운동을 더 많이 하기, 편지 쓰기, 커피와 소금, 식초, 감자칩 줄이기와 같은 결심을 세우지 않으련다. 나는 그저 더 조심스럽게 소비하고 살펴보고 나의 소비에 무감각해졌다는 마음이 들 때면 그 초대에 응답하여 나의 삶으로 돌아오는 초대에 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