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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기+여행기 수다

순례 일기 : 대구대교구 한티 성지

by 봄날들판 2017. 4. 28.
순례 일기 : 대구대교구 한티 성지

이번 부활 팔일 축제 시기에 나는 한티 성지 십자가의 길에 있었다.
미세먼지가 나쁨이라는데 팔공산 산속은 의외로 맑았고
산이라 그런지 밤새 내린 비에도 늦게 핀 벚꽃이 화사했다.
십자가의 길 10처 즈음에 어느 바위에 앉아서 가만히 햇볕을 쐬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평화롭네.
산이라 새순이 이제 막 나오기 시작한 주변에는 찔레나무만 힘껏 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십자가의 길 주위로 흩어져 있는 산소에는 지난해의 누런 잎 사이로 잔디가 겨우 돋아나고 있었지만 할미꽃과 제비꽃이 그래도 훌륭한 장식이 되어 주었다. 눈을 들어 주위를 보니 십자가의 길은 뒤로는 산등성이가 이어지고 양옆으로 작은 구릉이 감싸고 남쪽으로 넉넉하게 트여 있었다. 그리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내가 앉아 있는 곳은 지대가 평평해서 집도 충분히 지을 수 있어 보였고 이런 데 사는 것도 괜찮았겠다 싶었다. 숨어 살기에도 딱 좋은 곳이다.
평화롭군.
부활 팔일 축제 시기에 십자가의 길에 있는 것이 어색했는데
이렇게 평화로운 곳에 있자니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조금 앉아 있다가 내가 여기 온 이유를 찾기 위해 일어났다. 
육 년 전쯤 초여름에 성지 순례단에 섞여 관광 버스를 타고 한 번 온 적이 있었는데
꼭 다시 보고 싶은 곳이 있어서 가끔가끔 생각이 났다. 
우연히 이곳에 올 기회가 생겼고 나는 서울에서 기차를 탔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십자가의 길에 있었기에
첫날은 십자가의 길에 도통 갈 시간이 나지 않았다.
차를 타고 오면서 보니 피정의 집에서 십자가의 길까지가 상당히 멀어 보였다. (다음 날 가 보니 걸어서 오 분도 안 걸렸다.)
시간이 통 나지 않다가 둘째 날 점심 무렵에 프로그램에서 잠시 시간이 생겨서 얼른 밖으로 나왔다.
내 기억에는 십자가의 길이 굽이굽이 산길을 걸어 올라가는 먼 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가 보니 실제로는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한 눈길 안에 모두 보일 정도로 그다지 길지 않았다.
지난번에는 아마 처마다 멈추어서 십자가의 길을 바쳤기에 이곳이 실제로는 구릉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곳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나 보다.
기억이라는 게 왜곡이 심한 건지 내 기억에는 분명 이천 스승 예수의 수녀회 피정집에 있는 십자가의 길 정도였는데 이번에 보니 시흥 성 바오로 피정의 집 정도였다. 
한티 성지의 십자가의 길이 다른 성지의 그것과 다른 점은 십자가의 길 주위로 순교자의 묘가 있다는 점이다. 십자가의 길 주위로 순교자의 묘를 이장한 것이 아니라, 순교자의 묘 주위에 십자가의 길을 조성했다. 그늘이 진 곳은 떼를 입히지 않은 묘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잘 관리되고 묘비도 세워져 있었다.
십자가의 길 입구에서 올라올 때는, 제3처까지는 묘가 많지는 않다. 그러고 나서 제4처로 이동하려고 눈을 돌리면서 언덕 아래의 양지 바른 공간을 내려다보는 순간, 수많은 묘가 눈에 들어온다.
병인박해 동안 포졸들이 쳐들어왔고 교우촌 주변에서 사람들이 도망가지도 못한 채 그들의 손에 쓰러져갔다. 다른 신자들이 왔을 때는 수습을 할 수 없을 정도여서 그곳에 그냥 묘를 만들었다. 그래서 이곳에 묘가 많은 것이다. 이들이 도대체 무슨 죄가 있었길래 이렇게 산 속에서 학살당해야 했던 것일까? 우리는 왜 이들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까? 국가의 폭력에 죄없이 스러져간 이들의 아픔을 기억하는 것이 가톨릭 신자의 도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찾아간 곳은 그런 묘 중의 하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묘비다.
다른 묘비는 비교적 새로 만든 것이라면 이 묘비는 만든 지 오래 되어 보인다.
돌을 깎아 만든 것인지 시멘트를 부어 만든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오래된 것만은 분명하다.
십자가 모양의 오른쪽에 이끼 같은 것이 끼어 있어 세월을 가늠케 한다.
나는 경복궁 같은 데를 가도 돌만 바라보다가 올 정도로 사람이 깎아낸 오래된 돌의 느낌을 좋아한다. 시간의 고난을 이겨냈다는 것을 몸 자체로 보여 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묘는 묘가 모여 있는 중에서도 남쪽으로 있고 묘비도 남쪽을 향해 있어 일부러 다가가서 정면을 보지 않으면 묘비에 있는 장식을 볼 수 없다.
내가 찾던 것은 바로 이 묘비에 새겨진 작은 하트 모양이다.
그런데 사실 내 기억에는 그 하트 모양은 예수 성심의 하트 모양, 그러니까 화살도 있고 심장도 좀 더 모양이 분명한 그런 것이었다. 분명 기억에는 그랬다.
하지만 기억 속에서 빠져나와 큰 기대감 속에 바라본 그 단순한 하트 모양이 나에게 더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어떻게 보면 무척 귀엽고 어떻게 보면 무척 성스럽다. 과하지 않게 묘비의 다른 장식들과 잘 어울린다. 여기저기 성지에 가 보았지만 이렇게 성심 문양이 있는 경우는 본 적이 없었다. 이 비석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모양에서도 정성스럽게 만든 솜씨가 묻어났다.
그런 상상을 해 본다.
이 묘비를 만든 석공은 아마도 왜 이 묘비를 만드는지 알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는 묘의 주인을 개인적으로 알았을지도 모른다.
같은 천주교 신자로서 좋은 이웃이었을지도, 언젠가 도움을 주고 받았을지도, 혹은 그런 사람이 있다더라 풍문 속에서만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크나큰 슬픔 속에서도 묘의 주인을 위해 그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들이 예수 성심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을 알고 묘비에 그를 위해 무언가 해 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예수 성심, 그 사랑 속에 그가 세상을 떠날 때의 고통을 잊고 영원히 안식을 얻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묘비를 만든 때는 교회가 박해를 벗어난 시기였을 테니 그가 그 새로운 세상을 같이 맞이하지 못한 것을 크게 슬퍼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베풀고 간 사랑을 잊지 않으려고 그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장식을 그 묘비에 새겼는지도 모른다.
그 십자가의 길 전체에서 내 마음에 가장 와 닿은 것은 이 단순한 하트 장식이다. 묘비를 바라보면서 나는 묘비를 만든 사람의 마음이 전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 몇십 년이나 백 년은 넘었겠지만 그 마음은 따뜻했고 절실했고 실제적이었다.
어쩌면 이런 것도 부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을 먹으러 피정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 오른쪽에 초가집 몇 채에 장독대가 있었다.
옛 교우촌을 복원해 낸 모습이다.
하얗게 선 자작나무 몇 그루가 이제 막 이파리를 내고 있어 좀 이색적인 느낌도 들었다.
봄날의 평화로운 모습이 보기 좋다가도 문득 쌀은 어디 있었을 것이며,
교우촌 신자들은 겨우내 감자 같은 것으로 연명했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이 봄날의 산에는 먹을 만한 것이 겨우 쑥 정도밖에 안 보였다.
어제 차에서 올라오다 보니 이곳이 산 속으로 상당히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쌀 한 말 메고 오다가 지쳐서 주저앉을 만한 거리로 보였다.
일백 수십 년 전의 신앙의 선배들도 이 화사한 봄날에 이 산 속에서 부활을 맞았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부활 미사를 위해 신나무골로 20여 킬로미터를 걸어서 갔다고 간다.)
그리고 비어 가는 항아리를 보면서 당혹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래도 그들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게 나한테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신비다. 
내가 점심을 먹을 생각에(한티 피정의 집은 밥이 정말 맛있다.)
위에서 신호가 오고 있어서 더 그런 생각이 들었나 보다.
발길을 멈추어 한참 교우촌을 바라보다가 이내 나는 피정의 집으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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