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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신앙생활

어느 숲의 기억

by 봄날들판 2018. 5. 17.

어느 숲의 기억

 

내가 자란 곳은 집 바로 뒤에 아주 넓은 밤나무숲이 있었다. 겨울부터 여름까지 맨들맨들한 밤나무 가지에서 매달리기를 하며 동네 언니오빠들과 놀았고 가을에는 아주 어릴 때부터 작은 심부름을 하곤 밤 몇 톨을 얻었다. 날씨가 좀 풀리고 딱히 농사일 거들 게 없는 이월에서 삼월 사이에 판자를 구해다가 집을 짓고 엄마아빠 역할놀이 하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일찍 혼자된 밤나무집 할머니는 혼자 그 땅을 일구고 아들도 서울 유명 사립대에 보냈다. 근방에서 퍽 드문 일이었다. 민선 자치 시대가 열리면서 선거 열풍이 불자 아들은 선거에 나갔다. 그리고 연거푸 선거에 떨어졌다. 숲은 어느새 서울 사람 것이 되었다. 그게 중학교 입학 무렵이었다. 그리고 언제 갈아엎을지 몰라 아무도 가꾸지 않는 밤나무숲은, 커다란 궁전이 되어 갔다. 가지치기를 하지 않아 아래 가지가 말라 죽자 부드럽게 휜 기둥이 높다랗게 줄지어 선 어두운 궁전으로 변모했다. 그래서 밖에서 보면 나무가 한 덩이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태풍이 부는 날 우리 밭에서 보면 숲이 춤추듯 흔들리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나무 아래에선 그늘 탓에 가시나무 외엔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다. 그렇게 숲은 사춘기를 함께한 멋진 산책로가 되었다. 겨울에는 갈퀴로 낙엽을 긁어다가 언니와 쓰는 작은 방에 불을 땠다. 밤이 있어 터질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아버지가 늘 당부하곤 했다.

 

숲이 마침내 어느 유월에 무너졌을 때 나는 거기 없었다. 대학 첫학기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것이다. 방학을 맞아 내려온 집에서 숲의 벌건 살을 보고도 너무나 오래 예상한 일이었기에 아쉬움이랄 것도 별로 없었다. 이미 동네에는 서울에서 밀려난 공장이 하나둘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조금씩 서울이란 데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숲은 정말이지 오래 버텨 주었다. 고맙게도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으니까. 지금도 나는 고맙게 생각한다. 포크레인이 숲을 파헤치는 모습을 안 볼 수 있게 해 주어서.

 

서울 사람들은 이상했다. 세 달만 기다리면 밤이 수두룩 열릴 텐데 그것 하나 못 기다리다니. 본격적으로 공장터를 닦고 공구리로 바닥을 바른 것은 이듬해 봄이나 되어서였다.

 

정작 놀라운 일은 저녁을 준비하느라 부엌에 있을 때 일어났다. 새가 유난히 울어댔다. 처음에는 새가 우는지 몰랐다. 어디서 작은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다가 어느 순간부터 마음속에서 증폭되어 엄청나게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도무지 칼을 들고 감자를 썰 수 없었다. 밖으로 나갔다. 새가 우는 소리는 물론 그때까지 수없이 들어 보았지만 그런 처절한 소리는 처음이었다. 새가 가슴이 찢기도록 울어대고 있었다. 배고프다는 소리를 넘어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뱀이 공격할 때의 불안한 소리와도 사뭇 달랐다. 하루아침에 전쟁이라도 맞은 듯 반쯤 넋이 나간 소리로 들렸다. 그 울음을 인간의 말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어미새의 소리에 섞여 간간이 작은 소리도 들려왔다. 새끼인 모양이었다. 나는 그 이후 어디서도 새가 그렇게까지 미친 듯이 넋을 잃고 울어대는 것은 듣지 못했다.

 

엄마, 저 새는 왜 이렇게 이상하게 울어.

집이 없어졌잖아.

아 밤나무숲에 새가 살았던가. 본 적이 없는데.

밤벌레도 많고 얼마나 살기 좋은 데였는데. 많이 살았지. 가을이 아니면 사람도 안 들어가는 데였잖아.

아니 그럼 이제 집이 철거되었으니 저 옆이나 벌판 너머 숲으로 이사 가면 되지. 이삿짐도 없는데 왜 이사를 못 가.

거기서 평생 살았는데 이사 가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알아. 세간살이가 다 없어진 거잖아.

 

새는 우리 집 뒤에서 그 벌건 흙을 바라보며 일주일을 울다 떠났다. 물론 어디에서도 그런 숲은 찾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기억 속에서 가끔 그 새소리를 듣는다.

 

밤나무숲집 아들의 빚에는 아버지 돈도 있었기에 숲 귀퉁이 몇 평이 우리 것이 되고 숲의 흙을 퍼다가 바로 옆 우리 밭을 조금 높였다. 그렇게 내가 자란 숲의 역사가 모두 끝난 듯했다.

 

가을이 되어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흙을 높인 밭에서 고구마가 저마다 팔뚝 만하게 여문 것이다. 아버지가 늘상 고구마가 이게 뭐냐며 타박했는데 그해는 이런 고구마는 처음 본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지셨다. 그 뒤로도 여러 해나 그 밭은 놀라운 수확을 보였다. 마침내 밤나무숲의 기운이 빠진 뒤는 여느 평범한 밭으로 돌아갔다.

 

해외 출장 준비하면서 여행지 이동 동선을 짜려고 구글 지도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때 한번 우리집도 찾아보았다. 군데군데 마을을 채운 공장 사이로 둘레에 나무가 늘어선 우리집이 보였다. 동네에 공장이 많은 바람에 동네 집들은 남았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택지로 지정되어 동네 자체가 사라진 곳도 부지기수니까. 새의 운명이 되지 않은 것이 그저 운일 수도 있다.

 

그 뒤로 나는 딱히 마음 붙일 숲을 찾지 못했다. 도서관 숲이라고 말하면 너무 식상하고 오래전 이야기인 거고, 서울에 있는 건 나무이지 숲은 아닌 거다. 어쩌다 가게 되는 피정집의 숲이라고 말할까. 정말 좋아하는 피정집 숲이 하나 있긴 했다. 하지만 평창 올림픽 때문에 고속도로가 나면서 지금은 뭉개져 버렸다. 어쩌면 내가 토요일 오전의 학교 도서관을 좋아한 것도 줄지어 늘어선 약간 어두운 책장의 모습이 그 숲을 닮아서일까.

얼마 전 주말에 집에 내려가며 면소재지에서 택시를 탔다. 기사는 자신이 길을 잘 안다며 보통 가는 길로 가지 않고 다른 길로 갔다. 보니까 중학교 때 통학하던 샛길이었다. 작은 할아버지 예전 집은 괴상한 정원이 딸린 음식점이 되었고 과수원이며 작은 밭에는 공장과 노동자 숙소가 들어차 있었다. 백여 개도 넘을 성 싶었다. 작고 시끄러운 개를 풀어놓아 겨우 지나가던 과수원 앞은 이제 세콤 표시만 보이고 아무도 없이 정적이 흘렀다. 비 오는 날이면 진흙탕에 넘어지지 않으려고 조심해 걷던 가파른 숲길만 남고 양지 바른 과수원 자리에 모두 공장이었다. 거기 살던 새들도 어디론가 이사갔겠지.

나이 들어서 어딘가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면 밤나무숲이 있는 곳으로 갈 거다. 나도 모르게 새가 깃들어 산다면 나 역시 살그머니 새집을 지어다가 높다랗게 걸어 두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