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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화+콘텐츠 수다

서평] 홀로 걸어서 로욜라의 이냐시오

by 봄날들판 2011. 9. 1.
이냐시오 자서전과 함께 읽으면 좋은 책.

타인이나 물건에 첫 만남에서 편견을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가끔씩은 스스로를 불편해할 정도로 편견과 불편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런 만남은 어느날 내 마음에 징하고 울린 다음 그 사람이나 사물을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고
좋은 인상으로 다가갔던 만남보다 더 깊은 사귐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가끔 있다.
예전에 어떤 본당단체에서 활동할 때 너무나 신앙심이 깊어 보이는 신입회원 두 명이 그랬다. 
쉬는 시간에 아랑곳없이 대화하는 두 사람이 탐탁치 않아 모르는 척 뒷자리에서 엿듣던 나는 
어느새 한 달 뒤에는 소중한 두 벗을 얻었다.   

이냐시오 성인이 그랬다. 이냐시오 자서전이 내 서재에 자리를 차지한 것은 아주 오래전 일이다.
친구가 선물한 것은 아니고, 무슨 행사가 끝나고서 참석자에게 한 권씩 다 배포해 주어서 얻게 되었다.
처음에 읽으려니, 아니 성인전에 탄생, 성장과정 뭐 이런 것도 없고
갑자기 제3자 시점으로 20대 후반부터 성인전이 시작하는데,

'순례자'의 시선으로 이어지는 사건은 모든 일이 너무나 갑작스럽기도 하고, 
갈등이나 어려움이 너무나 어이없이 쉽게 풀어지기도 한다. 하여간 전혀 친절한 책이 아니었다.  

소설을 많이 읽어온 나로서는, 신앙 관련 서적을 얼마 읽지 않아 영 줄거리도 적응이 안 되고 뭔가 마음에 다가오는 걸 집어내기가 어려웠다. 그때의 나에게는 좀 벅찬 책이었나 보다. 책장에서 그래도 좋은 자리에다가 모셔두었다.

아주 한참 지나서, 독서 모임에서 갑자기 '이냐시오 자서전'을 다루기로 했다. 
한 챕터씩 읽고 맡은 장을 발표하며, 챕터를 끝낼 때마다 나눔을 하는 방식으로.
당시 내가 다른 책 읽자고 했던 거 같다.  
하여간 그러고서 두 주 정도 있다가 어느 가을 토요일 오후에 햇살이 비껴드는 작은 사무실에서 나눔이 있었다.
예상 외로 좋았다. 무척 좋았다. 모임을 이끄는 분이 내가 '친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부분들, 너무 '갑작스럽다'고 생각했던 부분들을 설명해 주면서, 나는 무심하게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내용들에 이냐시오 성인이 걸었던 영적 여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눔은 풍성했다. 지금도 책 귀퉁이에 적어둔 내용들을 읽으면 그때의 그 풍성함이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무엇보다 나는 '이냐시오 성인'에 대해 가지고 있던 편견들이 없어진 것이 너무나 좋았다.
이냐시오 자서전 나눔이 있고 나서는 '예수회 역사' 등 여러 책을 읽을 정도였으니까. 

들어가는 말이 너무 길었는데, 올해 갑자기 여름 휴가에 특별한 책을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윗을 돌아다니다가 휴가에 딱!인 책이 있어서 주문했는데, 결국 배송이 늦어져 휴가 가기 전날에야 겨우 받을 수 있었다. 내가 '어메이징한 책'이라고 부르면서 애지중지하는 이 책을 읽고나서 독서 열정이 다시금 샘솟아 이냐시오 성인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서점에 갔다가 발견한 책이 브라이언 그로간 신부님의 책 '홀로 걸어서 로욜라의 이냐시오'(이냐시오 영성 연구소)이다. 물론 분도출판사에서도 '로욜라의 이냐시오'라는 책을 냈지만, 일단 자서전보다 그다지 두꺼워 보이지 않으니 제외했다. 집중집중하여 하루 만에 다 읽었는데 이냐시오 성인의 진면목을 발견하고 싶다면 자서전을 읽고 나서 이 책을 읽는 게 가장 풍성하리라고 본다. (중간에 나처럼 독서모임을 하면 더 좋고)  

원래 스페인의 역사학자가 펴낸 책을 요약했다고 하는데, 요약하는 걸 쉽지 않아 하는 나로서는 참 닮고 싶은 요약의 달인을 만난 느낌. 이 책은 자서전이라는 지나치게 요약한 책과, 스페인 역사학자의 꽤 긴 책 사이에서 긴장을 유지하면서 편안하게 독자를 안내한다. 자서전의 문제점은, 이냐시오 성인이 너무나 겸손하신 나머지 감동적인 부분은 자서전에서 별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묘사하신 거였다고 본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장이 시작될 때마다 자서전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간단하게 혹은 중요한 부분은 인용하여 언급한 다음, 실제 그분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사정을 좀더 나 같은 사람이 잘 알도록 설명해 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앞서 말했듯이 자서전에는 성인의 성장과정이 전혀 나오지 않지만 이 책에는 자세하게 나온다. 그분이 다리를 다쳐 누운 침상에서 '고귀한 부인'에게 충성하고 싶은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로마에 있을 때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던 궁정생활의 경험을 하게 된 이유 등등을 이 부분에서 알 수 있다.   
감동적으로 다가왔던 부분은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성인과의 우정, 순례자로 학생으로 살면서 만난 주변 사람들과의 이야기이다. 
자서전을 읽으면서 이냐시오 성인이 여러 곳을, 아주 먼 거리를 순례했다고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래도 말을 타고 간다던가, 뭔가 좀 편한 방법으로 가셨으리라고 생각했는데, '홀로 걸어서'를 읽으면서 글자 그대로 이분이 홀로 걸어서 여정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많은 날을 홀로 걸어서 다닌 다음에 삶의 마지막 15년 동안은 로마를 거의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예수회의 발전을 위해서, 또 많은 이들에게 영신수련을 해 주기 위해 바쁘게 사셨다.

나는 자서전을 읽으면서 이냐시오 성인을 좀 딱딱하고 엄격한 분이란 인상을 받았었다. 그러나 '어메이징한 책'과 '홀로 걸어서'를 읽은 지금, 밑에 있는 그림처럼 이냐시오 성인이 '영혼들을 도와주기 위하여' 언제나 마음과 열정을 쏟았던 따뜻한 분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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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아일랜드의 예수회원인 브라이언 그로간 신부님. 영혼의 메아리에 이분의 글이 몇 있어서 기억이 난다.
트위터에 있나 찾아보았더니 없다. thank you 인사라도 하고 싶었는데 말이지.
역자는 오영민 신부님, 내가 좋아하는 카를로 카레토의 '보이지 않는 춤'을 번역하신 분이다. 아앗, 다시 찾아보니 로널드 롤하이저의 '내 안에 쉬게 하리라'도 번역하셨다. 그래서 번역이 읽기가 참 부드러웠구나.

St. Ignatius at prayer amidst the city of Rome
@by William Hart McNichols, S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