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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기+여행기 수다

내가 좋아하는 길 - 피정집과 성당

by 봄날들판 2012. 7. 16.

휴가의 계절, 쉼의 계절, 재충전의 시간이 다가왔다.

산으로 들로 바다로 떠나는 이 시간에

문득, 내가 머물고 싶은 장소를 떠올려보았다.

서울 하늘에 스모그가 자욱히 낀 날,

어디론가 가고 싶은데 처리해야 할 일이 쌓여 있는 날,

그냥 하염없이 몸이 축 처지는 날,

눈을 감고 내가 이런 장소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조용한 음악을 듣는다면,

기분이 얼마간 좋아진다.

 

명동 성당

명동 성당은 장마철에 가끔 생각난다.

요즘처럼 날씨가 아주 안 좋은 날,

먹구름이 가득 낀 날 해가 저물고 나서 명동 성당에 가 보자.

명동 성당 뒤편으로 불꺼진 교구청 별관 주차장 앞에서 은은한 솔나무 향기를 맡으면

문득 평화로움이 전해진다.

비가 쏟아지기 직전의 구름이 두텁고 낮게 깔린 날 가야 하는데,

주변 성당이나 수녀원은 불을 다 꺼서 어둡고

조금 떨어진 명동거리의 밝은 조명이 구름에 반사되어

아주 밝은 달빛이 비치듯 조금 붉은 달빛이 비치듯

신비한 분위기가 조성되기 때문이다.

아주 시끄러운 곳 바로 옆에 아주 조용한 곳이 있다는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거기 몇 개 안 되는 벤치에 앉아 있는 것도 좋다.

9시 반 전에는 나와야겠지. 그 즈음에 문을 닫으니까.

 

제주 이시돌 목장

여기 묵어본 적은 없지만,,,

어느 5월 말 여행을 갔다가 일행과 함께 무려(!) 새벽 5시 반에

허겁지겁 고산쪽에 있는 숙소를 나와 이시돌 목장을 지나서 고속도로를 타려고 했다.

아직 잠이 덜 깨어 무척 피곤한데, 문득 옆사람이 깨웠다.

넓게 펼쳐진 목장 위로 드믄드믄 말이 있고, (소였나?)

옅은 구름 사이로 아침 햇살이 비껴드는데,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세상은 이제 막 잠에서 깨려는 듯

조용하게 평화롭게 움직이기 시작하고

아침 햇살이 풍요로운 대지를 찬찬히 안아 주는 느낌이랄까.

너무 일찍 일어나서 툴툴거리던 마음은 새털같이 날아가고,

그 풍경이 지금도 내 마음에 새겨지고 그때부터 정말 제주를 좋아하게 되었다.

 

묵당 피정의 집

해발 700미터에 위치해 한여름에도 무척 시원한 곳이다.

피정집 뒤편으로 작은 시냇물이 흐르는데,

자그마하다고 말할 정도로 정겨운 시냇물이 구불구불 흐른다.

계곡 양 옆으로 능선이 있어 키큰 나무들이 온통 시냇물 주위를 감싸고 있기에

냇물은 그늘 속에 감추어져 있어 시원하게만 보인다.

그런데, 십자가의 길이 이 계곡을 따라 조성되었기 때문에 신발을 벗고

발을 물에 담근다든가 하는 행동을 하고픈 마음은 들지 않는다.

물놀이하기 딱 좋은 넓은 바위가 있는 곳 건너편에

바로 십자가의 길 제1처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발 밑으로 처음 보는 개구리들이 넌 누구냐? 하면서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곳,

어디선가 솜털뭉치 같은 처음 보는 생물이 튀어나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곳,

그런 곳이다. 참, 멧돼지는 조심하라고 하시더라.

시냇물은 숙소 건물 바로 아래, 그러니까 정확히는 경당 아래를 지나는데,

숙소에 있으면 비가 많이 올 때는 시냇물 소리가 크게 들린다.

 

성 바오로 피정의 집 자작나무 숲

피정의 집은 양 옆과 뒤편으로 낮은 구릉이 둘러싼 분지에 위치해 있다.

피정의 집 앞 연못을 지나 오른편에 있는 작은 숲으로 가면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어 동그란 작은 언덕을 따라 나 있는데,

자작나무숲은 십자가 길 끝에 있다.

피정지 서쪽에 있는 작은 숲의 경사면으로 온통 자작나무를 심어두었다.

9월 말의 오후 늦게 햇빛 가득한 날 숲에 서 있으면

사색적인 분위기에 빠져든다.

한없는 평화가 조용히 밀려든다.

 

나바위 성당 근처 금강 둑

꽤 오래전에, 당시 동갑이라는 이유로 급 친해진 어느 자매와

둘이서 장마철에 나바위 성지로 순례를 가서

예전에 사제관, 유치원으로 쓰였다는 낡은 건물에 묵었다.

짐을 내려놓고, 김대건 성인이 배를 타고 온 금강을 한번 보자며

시에도 자주 나오는 금강을 한번 보자며

논둑길을 조금 걸어 드디어 금강가에 닿았다.

경승용차 한 대 다닐 만한 너비의 둑길 아래로

장마로 불어난 강이 힘차게 흘러가고 있었다.

평야가 끝없이 펼쳐진 그곳에서 아무 소리도 없는 그곳에서

누런 흙탕물이 휘감아흘러가는 금강가에서

날이 흐렸고, 바람이 스쳐지나가는데

문득 아 좋다 이런 느낌이 들었다.

드넓게 펼쳐진 평야에 젖줄같이 생명을 전해 주는 강을 바라보며

장마철의 시원하게 얼굴을 스치는 바람을 맞으며

친구와 두런두런 사는 이야기를 하염없이 하던 일이 기억난다.

우리는 거기서 강경이 멀지 않은 듯하여

강경까지 걸어서 간 다음, 강경 성당 구경도 하고

다시 버스를 타고 나바위로 돌아왔다.

 

용소막 성당

많은 성당이 언덕 위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 역시 그렇다.

도로에서 차를 몰고 그 앞을 지나갈 때는 이곳이 그리 언덕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저 평지보다 살짝 높은 곳이라는 느낌을 줄 뿐이다.

하지만 성당 바로 앞마당에 서자, 아름드리 멋진 느티나무가 줄지어 선 그곳에 서자

그 얼마 안되는 차이가 참으로 멋진 풍경을 감추어두고 있었다.

아래쪽으로 작은 마을과 평야가 주욱 늘어서 있는데,

바라보는데 주욱 늘어선 그 평야를 따라 내 마음도 그렇게 풍요로워졌다.

한쪽으로 기찻길과 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어,

색다른 풍경을 조성하고 있다.

아름드리 느티나무를 두 팔로 껴안으며

성당 마당에 마냥 앉아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차분해진다.

정작 성당은 개방하는 시간이 아니라 들어가지 못했던 것 같다.

성당 뒤편으로 소나무숲에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는데,

숲 하나가 십자가의 길과 성모님을 위해 조성되었다는 느낌을 주었다.

장마철에 가면 짙은 솔향을 맡으며 사색에 빠져들 수 있다.

 

 

써놓고 보니 장마철 여행 중심이네.

역시 여행은 장마철에 비 쏟아진 직후에 다녀야 제맛인가 보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