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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74

어느 숲의 기억 어느 숲의 기억 내가 자란 곳은 집 바로 뒤에 아주 넓은 밤나무숲이 있었다. 겨울부터 여름까지 맨들맨들한 밤나무 가지에서 매달리기를 하며 동네 언니오빠들과 놀았고 가을에는 아주 어릴 때부터 작은 심부름을 하곤 밤 몇 톨을 얻었다. 날씨가 좀 풀리고 딱히 농사일 거들 게 없는 이월에서 삼월 사이에 판자를 구해다가 집을 짓고 엄마아빠 역할놀이 하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일찍 혼자된 밤나무집 할머니는 혼자 그 땅을 일구고 아들도 서울 유명 사립대에 보냈다. 근방에서 퍽 드문 일이었다. 민선 자치 시대가 열리면서 선거 열풍이 불자 아들은 선거에 나갔다. 그리고 연거푸 선거에 떨어졌다. 숲은 어느새 서울 사람 것이 되었다. 그게 중학교 입학 무렵이었다. 그리고 언제 갈아엎을지 몰라 아무도 가꾸지 않는 밤나무.. 2018. 5. 17.
사순 묵상] 수난 24_눈먼 소(키레네 사람 시몬) 수난 24_눈먼 소(키레네 사람 시몬) “그들은 나가다가 …… 사람을 보고”(마태 27,32) 어깨에 붉은 주름이 있는 이 거무스름한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그는 예수님의 행렬과 반대 방향에서 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예수님과 ‘반대’였습니다. 피부의 색깔부터 아무것도 모르고 뭐라도 상상하고 싶지 않아 한 ‘생각’의 색깔까지도요. 키레네 사람 시몬은 메시아이자 구세주이신 분과 관련된 예언적 관심사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는 이 유다인 사건과 하느님 나라의 이야기에서 전체적으로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한테 유일한 나라는, 식탁보보다 그리 크지 않은 농장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그곳에서, 저녁이 되어 처음으로 시원한 바람이 잔디와 그에서 불어온 밭에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 2018. 5. 17.
사순 묵상] 수난 23_오케스트라(예수님과 여인들) 수난 23_오케스트라(예수님과 여인들) “그 가운데에는 예수님 때문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여자들도 있었다.”(루카 23,27) 그날에 예루살렘의 모든 여인들이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절대 가 버리지도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병사들을 무서워하는 법도 없습니다. 어머니들은 아들이 겪는 수난에 울음과 울부짖음이 뒤섞인 악보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이 죽을 때 음악이 필요하며, 삶에 보내는 인사를 연주하는 것이 자신들이 할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수천 년간 그래 왔지요. 여인이자 어머니들은, 그 고통을 연주하는 악기들은 십자가 뒤에 그들의 소박한 오케스트라를 세웠습니다. 소리치던 그 나이 든 여인들은 클라리넷이었고, 후덕한 과부는 오보에였으며, 소녀들은 하프요, 그녀들을 응원하던.. 2018. 5. 17.
사순 묵상] 수난 22_곤충(십자가의 길) 수난 22_곤충(십자가의 길)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요한 19,17) 이제 그분이 가야 했습니다. 이제 그분은 이것이 여느 십자가가 아니라 그분 자신의 십자가라는(다리 저는 저 소년이 나의 아들이고 암에 걸린 저 나이 든 여인이 나의 어머니인 것처럼) 자각을 진 채 그분의 발로 움직여야 했습니다. 그것은 나무 조각이 아니라 우리 몸의 조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몸은 살과 뼈가 모인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숙명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사람과의 논쟁이 끝났습니다. 그분을 구하려고 하거나 그분을 팔아 버리려고 하거나 그분을 잃어버리게 된 비겁함과 배신과 부정과 책략의 상호 작용이 모두 끝났고, 완전히 끝났습니다. 우리는 이제 야외에 있습니다. 하늘이 넓습니다. 여윈 염소 떼가 길을 막거나, .. 2018. 5.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