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 02_아래에서부터
글을 쓴 작가가 이냐시오 관상 기도를 하면서 느낀 묵상을 중심으로 적은 것이라서 내용이 독특한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게시판의 글은 블로그에서 무단 복사하지 말아 주세요.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요한 13,1.5)
그분의 때가 왔습니다. 그리고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의 불길한 소리가 들려오자, 마치 미리 준비한 예식인 듯 예수님은 첫 번째로 가서 대야를 가져오셨습니다. 복음에서는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라고 나옵니다. 이러한 귀결이 문법의 단단한 순환 논법(tight circle)으로 표현되었기에, 우리는 이러한 논리 순서가 명백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서 예수님은 이층방에서 무엇을 시작하셨습니까? 어둡기만 한 메시지에 복종하여 거의 자동적으로 우러나온 첫 번째 행동은 어떤 방향으로 바뀌었습니까? 즐거운 휴식이 주는 편안함에서 벗어나, 그분은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자신이 얼마 안 있어 죽으리라는 것을 깨달으면 그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에게 남기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유언서를 작성합니다. 우리라면 종이와 펜을 달라고 하겠지요. 그리스도는 가셔서 대야와 수건을 가져와 대야에 물을 부으셨습니다. 유언은 여기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마지막 사람의 발을 말리고 나면 유언이 잘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라면 종이 위에 머리를 숙이고 이렇게 쓰겠지요. “내 집과 내 땅은 00에게 상속한다. …… ” 예수님께서는 물이 담긴 대야 위에 머리를 숙이고 벗들의 발에서 더러움을 없애 주십니다. 방에 침묵만이 가득한 가운데 정성스럽게 발을 씻어 주는 일은 오래도록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릎 꿇고 있는 이는 시간이 갈수록 숨소리가 한층 무거워졌습니다. 앞머리가 이마 위로 흘러내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일을 하시는 중일 때, 비슷한 높이에서 개 몇 마리가 식탁 아래서 어린 양의 마지막 남은 뼈다귀를 깨물어 먹고 있었습니다. 개들은 그렇게 파스카 만찬에 끼어들었다가 그들과 마찬가지로 네 발로 있는 그 사람의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아래에서부터 구원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마지막 모습에서 예수님은 위에서부터, 밝은 빛으로 나타나, 팔을 활짝 펴신 채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그렇지만 (구원의) 첫 번째 장면은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발가락 위에, 평범하고 속된 발톱 위에, 남이 좋아할 만한 것이 못 되는 그런 냄새 위에 그분은 마치 동물처럼 몸을 구부리고 계셨습니다. 자기 낮춤이라는 고귀한 기쁨을 자신에게 허락하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어떻게 우리의 발을 사랑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떤 측면에서 보면, 주님, 우리 몸이 불쾌한 것으로 이루어진 것은 전혀 아닙니다. 우리한테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필립보 사도는 뛰어난 사람에 어울리는 외모를 지녔고, 요한 사도는 소년 또래의 크고 부드러운 눈매를 가졌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선택하신 높이에서는 우정이나 마음에 들 만한 관계가 없습니다. 발은요, 그 발의 주인이 짓는 따뜻한 미소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발은 거칠고 야만적인 동물이지요. 그러니 발을 바라보아서는 그 발의 주인의 영혼을 믿기가 더욱 어려우며, 우리는 결국 사라지고 말, 그저 덧없는 꼭두각시 인형이라 생각하기가 더욱 쉽습니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죽은 이들은 모두 맨 발이며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서 발을 몸 앞에 내밀고 다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살아 있는 사람들은 일종의 본능적인 겸손함에 발이라는 튀어나온 몸의 부분을 숨기는지도 모릅니다. 베드로 사도는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라고 말하지요. 오 어부여, 당신이 그렇게 외치면서 발씻김의 섬김을 받지 않겠다고 반대한 것은 과도한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깊은 곳에서 일어난 결정이었습니다. 우리의 발은 더럽고 우스꽝스럽습니다. 발이 아무리 우리를 애무해 줄 수 있어도, 발이 아무리 희망에 가득 찬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서 역사를 만들 수 있어도 말입니다. 더러워해 하지 않고 우리의 발을 씻어 주실 수 있는 이는 우리의 엄마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아직은 …… 우리의 자존심을 어머니로서의 그리스도의 손길에 모두 내어맡기는 것을 통해서만, 대야 위로 몸을 구부리신 그분을 우리 발의 때를 박박 밀어 주시는 어머니와 동일시하는 것을 통해서만 구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
우리 모두 엄마가, 불쾌함의 느낌을 가지지 않는 이가 됩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스승의 모습도 있지만) 엄마의 모습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은, 엄마를 우리의 본으로 삼을 때에만, 그러니까 자신이 다시 어린아이처럼 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2-15)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 ’ 수난의 유물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나는 채찍도 창도 아니라, 더러운 물이 담긴 둥근 대야를 고르렵니다. 한쪽 팔 아래에 대야를 끼고서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발만을 바라보렵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무릎을 꿇고 몸을 구부릴 것이고, 그들의 발목보다 눈길을 더 높이 들지 않으렵니다. 적과 친구를 구별하지 않고 싶으니까요. 나는 무신론자, 마약 중독자, 무기 거래상, 갑자기 덤벼드는 소년을 죽인 이, 뒷골목 사창가에서 폭리를 취하는 포주, 자살한 이에게 발을 씻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깨달을 때까지 내내 말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할 것입니다.
나에게는 자신을 빵과 포도주로 변하게 하는 은사도, 피땀을 흘리는 은사도, 가시와 못을 참고 견디는 은사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려 할 때에 나의 수난, 예수님을 닮는 것은 여기서 멈출 수도 있을 것입니다.
transitory 덧없는, 오래 가지 않는
puppet 인형, 꼭두각시
글을 쓴 작가가 이냐시오 관상 기도를 하면서 느낀 묵상을 중심으로 적은 것이라서 내용이 독특한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게시판의 글은 블로그에서 무단 복사하지 말아 주세요.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요한 13,1.5)
그분의 때가 왔습니다. 그리고 식사 시간을 알리는 종의 불길한 소리가 들려오자, 마치 미리 준비한 예식인 듯 예수님은 첫 번째로 가서 대야를 가져오셨습니다. 복음에서는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다.’라고 나옵니다. 이러한 귀결이 문법의 단단한 순환 논법(tight circle)으로 표현되었기에, 우리는 이러한 논리 순서가 명백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서 예수님은 이층방에서 무엇을 시작하셨습니까? 어둡기만 한 메시지에 복종하여 거의 자동적으로 우러나온 첫 번째 행동은 어떤 방향으로 바뀌었습니까? 즐거운 휴식이 주는 편안함에서 벗어나, 그분은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자신이 얼마 안 있어 죽으리라는 것을 깨달으면 그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에게 남기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유언서를 작성합니다. 우리라면 종이와 펜을 달라고 하겠지요. 그리스도는 가셔서 대야와 수건을 가져와 대야에 물을 부으셨습니다. 유언은 여기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마지막 사람의 발을 말리고 나면 유언이 잘 끝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라면 종이 위에 머리를 숙이고 이렇게 쓰겠지요. “내 집과 내 땅은 00에게 상속한다. …… ” 예수님께서는 물이 담긴 대야 위에 머리를 숙이고 벗들의 발에서 더러움을 없애 주십니다. 방에 침묵만이 가득한 가운데 정성스럽게 발을 씻어 주는 일은 오래도록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릎 꿇고 있는 이는 시간이 갈수록 숨소리가 한층 무거워졌습니다. 앞머리가 이마 위로 흘러내렸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일을 하시는 중일 때, 비슷한 높이에서 개 몇 마리가 식탁 아래서 어린 양의 마지막 남은 뼈다귀를 깨물어 먹고 있었습니다. 개들은 그렇게 파스카 만찬에 끼어들었다가 그들과 마찬가지로 네 발로 있는 그 사람의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아래에서부터 구원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마지막 모습에서 예수님은 위에서부터, 밝은 빛으로 나타나, 팔을 활짝 펴신 채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일 것이다.”) 그렇지만 (구원의) 첫 번째 장면은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우리 발가락 위에, 평범하고 속된 발톱 위에, 남이 좋아할 만한 것이 못 되는 그런 냄새 위에 그분은 마치 동물처럼 몸을 구부리고 계셨습니다. 자기 낮춤이라는 고귀한 기쁨을 자신에게 허락하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어떻게 우리의 발을 사랑하실 수 있단 말입니까? 어떤 측면에서 보면, 주님, 우리 몸이 불쾌한 것으로 이루어진 것은 전혀 아닙니다. 우리한테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부분도 있습니다. 필립보 사도는 뛰어난 사람에 어울리는 외모를 지녔고, 요한 사도는 소년 또래의 크고 부드러운 눈매를 가졌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선택하신 높이에서는 우정이나 마음에 들 만한 관계가 없습니다. 발은요, 그 발의 주인이 짓는 따뜻한 미소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발은 거칠고 야만적인 동물이지요. 그러니 발을 바라보아서는 그 발의 주인의 영혼을 믿기가 더욱 어려우며, 우리는 결국 사라지고 말, 그저 덧없는 꼭두각시 인형이라 생각하기가 더욱 쉽습니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죽은 이들은 모두 맨 발이며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서 발을 몸 앞에 내밀고 다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살아 있는 사람들은 일종의 본능적인 겸손함에 발이라는 튀어나온 몸의 부분을 숨기는지도 모릅니다. 베드로 사도는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라고 말하지요. 오 어부여, 당신이 그렇게 외치면서 발씻김의 섬김을 받지 않겠다고 반대한 것은 과도한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깊은 곳에서 일어난 결정이었습니다. 우리의 발은 더럽고 우스꽝스럽습니다. 발이 아무리 우리를 애무해 줄 수 있어도, 발이 아무리 희망에 가득 찬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서 역사를 만들 수 있어도 말입니다. 더러워해 하지 않고 우리의 발을 씻어 주실 수 있는 이는 우리의 엄마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아직은 …… 우리의 자존심을 어머니로서의 그리스도의 손길에 모두 내어맡기는 것을 통해서만, 대야 위로 몸을 구부리신 그분을 우리 발의 때를 박박 밀어 주시는 어머니와 동일시하는 것을 통해서만 구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
우리 모두 엄마가, 불쾌함의 느낌을 가지지 않는 이가 됩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 (스승의 모습도 있지만) 엄마의 모습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은, 엄마를 우리의 본으로 삼을 때에만, 그러니까 자신이 다시 어린아이처럼 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깨닫겠느냐?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2-15)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 …… ’ 수난의 유물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나는 채찍도 창도 아니라, 더러운 물이 담긴 둥근 대야를 고르렵니다. 한쪽 팔 아래에 대야를 끼고서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발만을 바라보렵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무릎을 꿇고 몸을 구부릴 것이고, 그들의 발목보다 눈길을 더 높이 들지 않으렵니다. 적과 친구를 구별하지 않고 싶으니까요. 나는 무신론자, 마약 중독자, 무기 거래상, 갑자기 덤벼드는 소년을 죽인 이, 뒷골목 사창가에서 폭리를 취하는 포주, 자살한 이에게 발을 씻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깨달을 때까지 내내 말을 하지 않은 채 그렇게 할 것입니다.
나에게는 자신을 빵과 포도주로 변하게 하는 은사도, 피땀을 흘리는 은사도, 가시와 못을 참고 견디는 은사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려 할 때에 나의 수난, 예수님을 닮는 것은 여기서 멈출 수도 있을 것입니다.
dissolution 해산, 붕괴, 사멸
transitory 덧없는, 오래 가지 않는
puppet 인형, 꼭두각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