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난+기적: <예수님을 만나다> 번역

예수님의 기적 27_비타 도미티오beata dormitio, 복된 잠

by 봄날들판 2019. 4. 22.

예수님의 기적 27_비타 도미티오beata dormitio, 복된 잠

역자 주 : 저자 루이지 산투치가 너무 시적으로 써서 번역이 너무나 어렵군요.

우리가 날을 보내는 지상의 계곡인 태중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태어난 집이 있고, 동화 속 주인공들이 길을 잃는 숲이 있으며, 호화롭게 꾸민 말에 탄 기사들을 그린 그림이 있는 역사책이 있습니다. 바다 위에 뜬 배가 있어, 유일하게 사랑할 수 있는 여인한테서, 재산을 모으게 된 나라에서, 재산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나라에서 우리를 멀리 데려갑니다. 10월의 외로운 길이 있고, 이르게 내린 눈에 덮인 창턱이 있습니다. 밤과 낮과 계절과 침대와 불을 지핀 난롯가와 전쟁과 그리고 꿈이 있습니다. 고통과 기쁨,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과 지금은 우리가 잊어버린 이들로 이루어진 운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죽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마지막으로 배우는 단어입니다. 의미가 있거나 잴 수 있는 어떤 것도 이 단어에 해당하지 않으니까요. 어머니는 자식 앞에서 이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자식이 이 단어를 말하고 싶어 할지라도요. 우리는 이 단어를 삶의 신비를 표현하는 다른 단어들과 함께 혼자서 배워야 합니다. 시인과 음악가들은 이 단어를 노래하고 화가는 그것을 그림으로 그립니다. 그렇지만 죽음을 표현해 보려고 더 많이 애쓸수록, 그들의 은유는 독특하게도,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을 더 많이 반복합니다. 무시무시한 프레스코화가 주는 공포, 울음 가득한 장송곡의 울리는 소리, 가장 어두운 애도곡의 선율들은 우리를 (죽음이라는) 수수께끼와 아주 조금도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해 주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이미지의 과도함에 불과합니다. 무섭기는 하지만 또한 여전히 따뜻하고 떨리지요. 해골들과 장례식장의 백합은 태양이나 유쾌한 저녁 식사보다 더 우리한테 친숙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유일하게 아는 영역, 실체의 영역을 상쇄해 주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실체가 없기에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습니다. 상상 속에서조차, 우리는 색깔이 없는 그 강을 건너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는 전부는 그것이 우리를 기다리면서, 이곳 우리의 몸 속에, 우리가 좋아하는 친구의 몸 속에 둥지를 튼 채 언제나 누워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하게 될 일이 너무나 무서워서 우리는 그것에 견줄 수 있을 만한 증오를 알지 못합니다. 그것에 맞서기 위해 우리가 가진 전부는 망각이라는 절망입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죽음과 화해하게 하십니다. 오로지 그분의 성인들만이 죽음을 집처럼 편안하게 느끼게 해 줍니다. 그들의 동굴에서 마치 길들인 괴물처럼 그들을 쓰다듬어 줍니다. 비타 도미티오Beata dormito, 복된 잠. 기쁜 잠. 악몽을 완전히 자연의 자비로운 일로, 화환과 하얀 베개와 평화롭고 순수한 꿈들이 관련된 것으로 바뀌게 한 향기로운 음절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이래로 죽음은 어린 시절이 정취를 되찾았습니다. 기쁜 소식이 있은 다음 날, 모든 이름이 바뀌었고 무덤은 요람이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가족은 즐거운 단순함으로, 그분의 의로운 사람들이 죽는 날을 천상 탄일dies natalies이라고 부를 것이고 시체는 성유골이라 부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위가 조용한 무덤에서 빛을 뿌릴 때, 그것은 바이올렛의 꽃향기를 퍼뜨릴 것입니다. 그 뼈를 만지고 아픈 이들이 나을 것이고 그곳에서 기쁜 기적이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의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죽음은 세상이 죽을 때 함께 올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지막 헐떡임으로 애착을 없애 줄 것이고, 아버지의 집에서 우리를 깨워 줄 것입니다. 그렇지만 또 다른 죽음이 있습니다. 유일하게 실재하는 죽음, 태양과 함께 놀랄 만한 색깔로 우리 주위를 계속 돌고 도는 세상에서 눈을 뜬 채 고통을 겪는 죽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이의 죽음입니다.

성인 가운데 가장 순수한 분, 그들을 위해 그들의 죽음이 축제가 되게 하신 분께서 그들의 친구들의 죽음의 침상에서 부끄러워하지 않고 우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미소를 지으면서 두 어린아이를, 하나는 나인에서, 또 하나는 야이로의 집에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습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라자로의 무덤에서는 우실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에서 다시 생명을 되찾은 그 세 사람은 실은 세 사람 이상이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단지 라자로, 야이로의 어린 딸, 나인의 과부의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마르타와 마리아였고, 야이로와 그의 아내였으며, 그녀의 아들을 묘지까지 함께 동행한 과부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었고 친구였고, 결국 그 자신에 대해 가엾이 여긴 분이었습니다. 나병 환자도, 눈먼 거지도, 악에 사로잡힌 사람도 수의를 입은 그 죽은 이들만큼, 뒤에 남아서 쓰라린 운명에 눈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그 살아 있는 시체만큼 지구의 얼굴에 그런 고통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연민에 압도되어 그리스도께서는 오로지 하느님으로부터만 올 수 있는 전능하신 영으로, 그렇지만 단지 인간에 불과한 사람의 쉬어 버리고 두려워하는 목소리로 놀라운 명령을 말씀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