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일 : 세 가지 겸손
Three Kinds of Humility
By Tim Muldoon
이냐시오 성인은 오랫동안 많은 영적 스승들이 말해 온 것과 마찬가지로 겸손이 영성생활의 전제 조건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영신수련에서 그는 겸손 세 가지를 이야기하지요.
하느님께 완전히 순명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는 것.
하느님을 위해 명예나 불명예, 가난이나 부 또는 무엇이든 준비되어 있는 것.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기에 하느님을 위해 가난과 불명예를 원하고 심지어는 바보가 되는 것.
이냐시오 성인은 셋 가운데 마지막 겸손함은 그리스도와 같이 되고자 하는 갈망을 나타내는 것이기에 가장 완전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처럼 철저한 겸손을 권고하는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혼란스럽고 더 나아가 위험하기까지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부당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겸손함이라는 이름 아래 불의에 안주해야 한다는 의미로 오해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고대의 사상가와 현대의 사상가 모두 그와 정반대의 의미임을 시사합니다. 훌륭한 삶이란 겸손함을 거부하고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덕을 받아들임을 특징으로 가진다고 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큰 영혼을 소유함’(great-souled-ness) 또는 오늘날의 말로 ‘만족하면서 살기’(living large)를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겸손을 이야기하는 걸까요?
1640년에 플랑드르 예수회는 예수회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책을 펴냈습니다. 이 책에는 작자 미상의 글이 하나 실려 있는데, 그 글에서 이냐시오 성인이 예수회원들에게 겸손을 권하면서 무엇을 전하고자 했는지 알려 주는 작은 단서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Not to be constrained by the greatest thing, but to be contained in the smallest thing, is divine.”
가장 큰 것에 얽매이지 말고 가장 작은 것에 속하십시오. 그것이 거룩함입니다.
예수회 신학자 브라이언 데일리는 이 글이 이냐시오적인 겸손에 대해 알 수 있는 단서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충실하게 따르는 이는 관대함(magnanimity, 큰 영혼을 소유하는 것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덕)과, 그리스도를 본받아 하느님의 말씀에 겸손되이 복종하는 것 사이에서 일종의 긴장 상태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냐시오 성인이 자주 하신 말씀인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위대한 일을 추구합니다. 이는 세상의 인기와 명예라는 일반적인 척도가 아니라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한” 사람의 사랑으로 잴 수 있습니다. 겸손의 세 번째 단계는 세상에서 가장 험하고 소외된 지역에 살면서 그곳에서 위대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자유분방하게 사랑하는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행복 선언’에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부유하게 사는 사람들보다 이미 앞서 있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그들이 잘못된 갈망을 버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사는 곳에서 사랑을 드러내기만 하면 됩니다.
* 지금까지 본 이냐시오 성인의 그림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