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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기적: <예수님을 만나다> 번역

사순 묵상] 수난 03_숨는 곳

by 봄날들판 2018. 3. 22.

수난 03_숨는 곳

“받아 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 ”(마태 26,26)

글을 쓴 작가가 이냐시오 관상 기도를 하면서 느낀 묵상을 중심으로 적은 것이라서 내용이 독특한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게시판의 글은 블로그에서 무단 복사하지 말아 주세요.    

모든 것이, 이미 예견된 것이었고 기록에 쓰인 것이었습니다. 성변화(consecration)도 거기에 들어가지요. 그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이신 그리스도께는 그분조차도 놀라워할 만큼 예상을 벗어나고, 진심 어린 심리 작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심리는 즉흥적인 자유로움 속에서 성부의 영원하신 뜻에 신비한 방법으로 일치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이 복음 구절에서 나는 그분 눈길이 식탁보 위, 빵의 남은 조각 주위에서 맴도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문득, 말로 표현할 길 없는(또는 입에 올리기 어려운) 영감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것이 그분이 몸을 숨기는 장소가 될 것이라고요. 이것이 그분이 몸을 피하는 곳이 될 것이라고요. 그날 밤 그들은 그분을 완전히 붙잡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야 그렇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분의 친구들한테서 아주 먼 곳으로 그분을 끌고 갔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만 실은 유령을 못 박고 십자가에 매달 것입니다. 그분이 그 빵 속에 자신을 숨기셨으니까요. 갈릴리에서 그들이 예수님을 붙잡아 그분을 죽이든가 그분을 임금으로 삼고 싶어 했을 때는, 그분이 몸을 숨기는 요령으로 시야에서 사라지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은 이미 쪼개 놓은 빵 위로 손을 내밀어 더 작게 부수신 다음 그것을 위로 들어 올려 신비의 변화(transition)를 일으키는 말씀을 외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마르 14,22)

…… 아닙니다. 이는 창으로 찔리는 것을 피하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고문하는 이들에 의해 찢어지게 될 (유령이 아니라) 그분의 몸 전부는 거기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숨는 곳은 여전히 확실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그것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분은 아무도 수색해서 찾아낼 수 없고, 제자들의 손에서 억지로 빼앗아 갈 수도 없는 그리스도를 제자들에게 남겨 주셨습니다. 그들이 그분을 먹게 한 것으로요. 그들의 가슴이, 숨는 곳의 숨는 곳이 되게 한 것으로요. 조금 전에 예수님은 그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몸에서 가장 하찮은 부분으로 그분 자신이 때가 묻게 하셨습니다. 이제 그분은 더 많은 것을 하고자 하십니다. 제자들의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서 점막과 섞여 자신을 변화하게 할 만큼이 되고, 그들의 몸의 모든 조직 속으로 서서히 녹아들어 가고자 하십니다.

성체성사가 나타내는 첫 번째 상징성은 신비하기보다는 실제적입니다. 계속 남아서 세상을 살아가게 될 벗들의 물질적 존재에서 거의 떨어지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무엇보다 먼저 그 자체를 높이는 부드러운 어조로 “이는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내 영이다.’라거나 ‘이는 만들어진 선함 혹은 행복이다.’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셨더라면 제자들은 아마 그런 것으로 뭘 해야 할런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한테는, 유일하게 그들이 정말로 알고 우리의 마음과 기억을 붙들어 주는 것, 곧 몸에 머무르는 것이 꼭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호감이 가고 받아들일 만하며 흔한 형태여야 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은 식탁보를 내려다보다가 가장 쉽고 편하며 구체적인 것, 곧 빵을 찾으셨습니다. 배고픔을 풀어 주고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머물기 위해서. 그날 저녁,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분과 마침내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게 되기까지 몇천, 몇만 번의 저녁나절을 지나야 하는지 헤아려 보셨습니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겠구나 하고 헤아리셨습니다. 사람은 며칠 지나면 다 잊어버리고 만다는 것을 그분도 알고 계셨습니다. 서로 떨어진 간극은 모든 것을 없애버리지요. 사랑하는 연인이 땅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멀어지면, 아무리 편지에 머리카락을 곱게 넣어 보낸들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물론이고 요한과 안드레아와 야고보가 그분을 잊을 수도 있기에, 그래서 그들의 자식이, 자식의 자식이 잊지 않게 하기 위해 그분은 그분과 나 사이에 빵이라는 결코 끝나지 않는 그 다리를 두셔야 했습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 ”

그렇지만 그분이 곧 이어서 들어 올린 잔에는 뭔가 다른 것이, 다른 표징이 담겨 있습니다. 이제는 친구들이 펼치는 보호 아래에서 거의 해를 입지 않고 도망치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포도주는 피였습니다. 폭력과 비극을 상징하는, 몸 밖으로 흘리는 피 그 자체였습니다. 그 피를 몸에서 뽑아내려면 철을 두른 증오의 일격이 필요할 것이고, 그분의 몸이 고통스러워하며 외치게 될 것이며, 고통 뒤에 죽음이 뒤따를 것이고, 이 모든 것이 수난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갚아야 하는 빚이 정확히 얼마냐에 따라, 씻어내야 하는 때가 얼마나 많은가에 따라 되돌아올 것입니다.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8)

우리한테는 죄와 피의 관계, 죄와 그 잔을 마시는 것의 관계를 살펴보려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의 권고는 단호하고 마음에서 우러났습니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마태 26,27) 마치 그분이 피 없이 돌아가시지 않도록 막는 것은, 귀한 피가 맨땅의 쐐기풀과 돌멩이 사이로 흘러들어가 잃게 되는 것을 막는 것은 그분의 상처에서 솟은 것을 마실 때만이 가능합니다. 마치 그분의 고통에서 짜낸 그 음료를 마심으로써 생명과 기쁨과 그분 뺨의 빛깔이 세상에 되돌아오는 것처럼, 세상에 사는 우리 가운데 계시는 그분의 생명은, 끝나는 게 아니라 황금빛으로 빛나는 크리스마스 밤에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마태 26,27)라고 복음사가가 썼습니다. 그러고 나서 제자들은 문득 저녁 식사가 전부 끝났음을 깨달았습니다. 포도주가 이제 더는 포도주 맛이 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