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 05_긴 이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요한 16,5)
만찬이 끝났습니다. 드디어 모든 것을 마쳤습니다. 음식도 행동도 몸짓도요. 유다가 배신을 저질렀습니다. 예수님이 빵과 포도주를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이 동료들을 남겨 두고 가셨습니다. 그분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입을 맞추어 주시지도, 이름을 불러 주시지도 않았습니다. 해야 할 말이 많으셨고 그것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분을 따른 이유가 그분의 기적 때문이 아니라는 걸 그분은 아셨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라는 물음에 베드로 사도가 어떻게 대답했는지도 잘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 그분의 마지막 말씀. 영원성으로 마법에 걸린 말씀. 그래서 그 말씀이 그들과 함께 머물고, 이후에도 그들의 자식과 자식의 자식과 수천 년을 함께 머물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입을 맞추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이 이야기하신 첫 번째 요지가 그분을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 인간의 어떤 포옹보다도 훨씬 더 단단하게 묶어 주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5) 서로의 어깨에 팔을 두르는 것은 무의미한 행동이었습니다. 서로 떨어진다는 것은 이후로 말도 안 되는 것이었으니까요.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이 선언에 담긴 축복을 생각해 보세요. 그들에게 힘이 없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을 들었는데 ……, ‘아무것도’라……, 그날 밤 울린 그분의 목소리 말고 다른 무엇이 이토록 굴욕적인 말씀을 즐거운 것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은 들었습니다. 지금 그들은 얼굴을 비추는 불빛 아래 그림자 속에서 아무 말 없이 크게 기뻐하면서 듣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내려진 지시를 들어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4.17)
그분은 그들이 종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보다는 친구라 부르셨습니다. 그렇지만 이때에는 그들을 친구들에게 말할 때 그러하듯이 권하는 말투가 아니라, 종에게 하듯이 확고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요한 15,17) 이어서 이르십니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물론 그들은 서로 사랑했습니다. 이미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밖이 어두울 때에 그들은 식탁에 둥글게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서로에 대해 따뜻한 추억을 주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이보다 더 쉬울까요? 이보다 더 기분 좋을까요? 말씀이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그러고 나서 증오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옮기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요한 15,18)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19) ‘그들은 까닭 없이 저를 미워하였습니다.’(요한 15,25)
그렇지만 갑자기 그분 말씀이 더 거칠어지고 알쏭달쏭해집니다. 전에 그분은 박해와 비극에 대해 이야기하신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요한 16,2))라고 하신 적이 있지만요. 예견할 수 없고 이상하며 듣기 거북한 선언을 하실 때, “나는 이제 ~을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선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분이 말씀을 멈추고 마치 알려지지 않은 리듬의 심벌즈를 치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0-21)
기쁨이라니? 완고한 그 사람들이 서로의 귀에 속삭였습니다. ‘기쁨’이라니?, 주님, 그게 무슨 동물인가요? 저희는 그게 어떤 건지 더는 기억나지도 않고 두 번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아니면 그게 우리가 같이 놀 수 있는 여자와 같은 것입니까? 아니면 어떤 냄새 같은 겁니까? 그래서 그리스도가 설명해 주십니다. ‘나중에 그들에게 나타나실 특별한 분을, 특별한 이름을 지니신 분을 말하는 것 같구나.’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그분은 이제 막 사람이 겪어 본 가운데 가장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고난을 겪으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만약 세상이 이겼더라면 이 구절이 여전히 허용되었을까요? 그리고 기적이 여전히 가능했을까요?
그분이 팔꿈치를 식탁에 기대고 간간히 길게 길게 말을 멈추시면서 계속 이야기하고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눈길을 위로 향하시고 ‘그들’에 대해 말하기는 하지만 더 이상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한테는 그분의 거룩한 무아지경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독백이 부서진 채 그들한테 왔고 혼란스러웠습니다. 마치 벌 한 마리가 윙윙거리며 날아다니다가 지금은 여기 자리 잡았다가 저기 자리 잡았다가 지금은 보이지 않는 듯했습니다. 그들은 그분이 여전히 기쁨, 영광, 세상에 대해서 말씀하신다고 느꼈습니다. 포도주로 취기가 올라오고 잠이 쏟아져서 안간힘을 쓸 때 그런 단어들에 관심이 기울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여전히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신다고 느꼈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 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 저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지만 이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빕니다.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말씀이 의미에 하나도 가 닿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도 우리에게도 가 닿지 못했습니다. 이분의 입술에서 빠져나온 말이, 마치 모든 사냥꾼이 죽은 계곡에서 저절로 연주되는 뿔에서 나온 악보와 같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이미 아버지 안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너무나 신비하고 멀리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아무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그분께 묻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분의 말씀을 알아들으려고 더는 안간힘을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식탁을 둘러싼 채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있으면서 그날 밤에 한 번도 넘게 거듭 말씀하시는 희망에 전율하면서, 그런 심오한 말씀들을 들으면서 있는 것, 그걸로 우리한테 만족스러웠고 그들한테도 만족스러웠습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 ”
* 단어 찾기
be pointless to ~은 무의미하다
bewitched 매혹하다 황홀하게 하다 마법을 걸다
mortify 굴욕 당황스럽다 놀랐다 억제하다
voluptuous 향락적인 관능적인 육감적인
enrapture 황홀하게 하다 크게 기뻐하다 황홀케 하다
exhort 훈계하다 강력히 권고하다 권하다
inflexible 확고한 구부릴 수 없는 굳은 강직한 완고한 변경할 수 없는
implacable 무자비한 달래기 어려운 앙심 깊은
unforeseeable 예견할 수 없는
corresponding to 일치하다
implacable 무자비한 달래기 어려운 앙심 깊은
repudiate 부인하다 거절하다 거부하다
cymbal 심벌즈
pronouncement 선언 발표 판결
peculiar 특이한 특별한 특유한
ordeal 시련 고난 괴로운 체험
permissible 허용되는 무방한 소지가 허가된
delirium 섬망 무아경 일시정신착란
perch 높은 곳 앉다 자리잡다
torpor 무기력 마비 상태 무감각
crouch 숙이다 구부리다
abstruse 난해한 심오한
trembling 떨림 전율하는 떨기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요한 16,5)
만찬이 끝났습니다. 드디어 모든 것을 마쳤습니다. 음식도 행동도 몸짓도요. 유다가 배신을 저질렀습니다. 예수님이 빵과 포도주를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이 동료들을 남겨 두고 가셨습니다. 그분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입을 맞추어 주시지도, 이름을 불러 주시지도 않았습니다. 해야 할 말이 많으셨고 그것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그분을 따른 이유가 그분의 기적 때문이 아니라는 걸 그분은 아셨습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라는 물음에 베드로 사도가 어떻게 대답했는지도 잘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 그분의 마지막 말씀. 영원성으로 마법에 걸린 말씀. 그래서 그 말씀이 그들과 함께 머물고, 이후에도 그들의 자식과 자식의 자식과 수천 년을 함께 머물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입을 맞추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이 이야기하신 첫 번째 요지가 그분을 열한 명의 제자들에게 인간의 어떤 포옹보다도 훨씬 더 단단하게 묶어 주었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5) 서로의 어깨에 팔을 두르는 것은 무의미한 행동이었습니다. 서로 떨어진다는 것은 이후로 말도 안 되는 것이었으니까요.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이 선언에 담긴 축복을 생각해 보세요. 그들에게 힘이 없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는 것을 들었는데 ……, ‘아무것도’라……, 그날 밤 울린 그분의 목소리 말고 다른 무엇이 이토록 굴욕적인 말씀을 즐거운 것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은 들었습니다. 지금 그들은 얼굴을 비추는 불빛 아래 그림자 속에서 아무 말 없이 크게 기뻐하면서 듣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내려진 지시를 들어 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4.17)
그분은 그들이 종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보다는 친구라 부르셨습니다. 그렇지만 이때에는 그들을 친구들에게 말할 때 그러하듯이 권하는 말투가 아니라, 종에게 하듯이 확고한 명령을 내리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요한 15,17) 이어서 이르십니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7)
물론 그들은 서로 사랑했습니다. 이미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밖이 어두울 때에 그들은 식탁에 둥글게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서로에 대해 따뜻한 추억을 주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이보다 더 쉬울까요? 이보다 더 기분 좋을까요? 말씀이 계속해서 이어졌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그러고 나서 증오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옮기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요한 15,18)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19) ‘그들은 까닭 없이 저를 미워하였습니다.’(요한 15,25)
그렇지만 갑자기 그분 말씀이 더 거칠어지고 알쏭달쏭해집니다. 전에 그분은 박해와 비극에 대해 이야기하신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요한 16,2))라고 하신 적이 있지만요. 예견할 수 없고 이상하며 듣기 거북한 선언을 하실 때, “나는 이제 ~을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선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분이 말씀을 멈추고 마치 알려지지 않은 리듬의 심벌즈를 치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너희는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다.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0-21)
기쁨이라니? 완고한 그 사람들이 서로의 귀에 속삭였습니다. ‘기쁨’이라니?, 주님, 그게 무슨 동물인가요? 저희는 그게 어떤 건지 더는 기억나지도 않고 두 번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아니면 그게 우리가 같이 놀 수 있는 여자와 같은 것입니까? 아니면 어떤 냄새 같은 겁니까? 그래서 그리스도가 설명해 주십니다. ‘나중에 그들에게 나타나실 특별한 분을, 특별한 이름을 지니신 분을 말하는 것 같구나.’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그분은 이제 막 사람이 겪어 본 가운데 가장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고난을 겪으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만약 세상이 이겼더라면 이 구절이 여전히 허용되었을까요? 그리고 기적이 여전히 가능했을까요?
그분이 팔꿈치를 식탁에 기대고 간간히 길게 길게 말을 멈추시면서 계속 이야기하고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눈길을 위로 향하시고 ‘그들’에 대해 말하기는 하지만 더 이상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한테는 그분의 거룩한 무아지경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독백이 부서진 채 그들한테 왔고 혼란스러웠습니다. 마치 벌 한 마리가 윙윙거리며 날아다니다가 지금은 여기 자리 잡았다가 저기 자리 잡았다가 지금은 보이지 않는 듯했습니다. 그들은 그분이 여전히 기쁨, 영광, 세상에 대해서 말씀하신다고 느꼈습니다. 포도주로 취기가 올라오고 잠이 쏟아져서 안간힘을 쓸 때 그런 단어들에 관심이 기울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여전히 그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신다고 느꼈습니다.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었는데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습니다. …… 저는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을 위하여 빕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아버지의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 저는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지만 이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 이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 ……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들도 제가 있는 곳에 저와 함께 있게 되기를 빕니다.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말씀이 의미에 하나도 가 닿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도 우리에게도 가 닿지 못했습니다. 이분의 입술에서 빠져나온 말이, 마치 모든 사냥꾼이 죽은 계곡에서 저절로 연주되는 뿔에서 나온 악보와 같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이미 아버지 안에 계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너무나 신비하고 멀리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아무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그분께 묻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분의 말씀을 알아들으려고 더는 안간힘을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식탁을 둘러싼 채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있으면서 그날 밤에 한 번도 넘게 거듭 말씀하시는 희망에 전율하면서, 그런 심오한 말씀들을 들으면서 있는 것, 그걸로 우리한테 만족스러웠고 그들한테도 만족스러웠습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 ”
* 단어 찾기
be pointless to ~은 무의미하다
bewitched 매혹하다 황홀하게 하다 마법을 걸다
mortify 굴욕 당황스럽다 놀랐다 억제하다
voluptuous 향락적인 관능적인 육감적인
enrapture 황홀하게 하다 크게 기뻐하다 황홀케 하다
exhort 훈계하다 강력히 권고하다 권하다
inflexible 확고한 구부릴 수 없는 굳은 강직한 완고한 변경할 수 없는
implacable 무자비한 달래기 어려운 앙심 깊은
unforeseeable 예견할 수 없는
corresponding to 일치하다
implacable 무자비한 달래기 어려운 앙심 깊은
repudiate 부인하다 거절하다 거부하다
cymbal 심벌즈
pronouncement 선언 발표 판결
peculiar 특이한 특별한 특유한
ordeal 시련 고난 괴로운 체험
permissible 허용되는 무방한 소지가 허가된
delirium 섬망 무아경 일시정신착란
perch 높은 곳 앉다 자리잡다
torpor 무기력 마비 상태 무감각
crouch 숙이다 구부리다
abstruse 난해한 심오한
trembling 떨림 전율하는 떨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