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 15_몽유병자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루카 22,62)
예수님의 죽음이 시작된 밤 동안, 이 쓰라린 울음이 터져 나와 이야기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다시 울려 퍼졌습니다. 첫 번째 피가 정원에서 흘렀고, 첫 번째 구타가 저택에 있던 한 종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흐느낌은 나무 때는 곳 옆에서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날이 추워 종들과 성전 경비병들이 숯불을 피워 놓고 서서 불을 쬐고 있었는데, 베드로도 그들과 함께 서서” 불을 쬐었기 때문입니다.
수탉이 울었다는 이유로 한 남자가 울었습니다. 베드로의 닭은 새벽을 환호하며 맞은 게 아닙니다. 밤이 깊어도 아직 새벽이 먼 시간이었습니다. 그 닭이 예루살렘의 뒷마당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남모르게 사명을 받은 대로 스승의 계획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래서 몽유병자들을 깨우려고 딱 맞는 시간에 울기 시작했습니다. 닭이 두 번 울어야 했는데 두 번째 울 때 몽유병자가 정신을 차렸습니다. 마치 밤에 서성이며 돌아다니는 불쌍한 사람들처럼, 갑자기 깨어난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마치 혈관에서 나는 피처럼 목에서 흐느낌이 울컥울컥 나왔습니다. 불가에 모인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이상하게 변하였는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사람은 자신이 그들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하려 하면서 분노에 차서 공격적으로 말했습니다. 카야파의 종이, 그러고 나서 하녀가, 또 세 번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이 물어보았으나 소용없었습니다. 그는 그와 반대로 대답했습니다. “이 여자야, 나는 그 사람을 모르네. …… ” “이 사람아, 나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 ” 그러고 나서 그는 그것을 끝내기 위해 맹세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목소리가 너무나 커서 그는 닭이 처음으로 울 때 듣지 못했습니다. 느끼는 거라고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과거에 대한 쓰라림 혹은 짜증이었습니다. 그리 재미없는 모험에 끼느라고 평화롭게 살던 어부의 그물을 버리고 떠난 것에 대한 감정, 그리고, 그래요, 그렇게 무서운 혼란으로 그를 끌고 간 떠돌이에 대한 감정이요. 심장과 위 사이에서 무엇보다도 느껴지는 것은, 두려움이라고 부르는, 얼음처럼 차가운 낙지icy octopus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칠면서도 정중한 수다로 그것을 깨부수려고 애썼지만 성공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분은 가 버려서, 그를 그 마당에, 틀림없이 이미 녹초가 되었을 다른 사람들이 밤을 새우는 곳에 붙잡아 두게 되었습니까? 하늘만이 그들이 그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베드로에게 무엇을 했는지 압니다. 베드로는 코와 수염 모양을 바꾸고 싶어 했을 겁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그를 기억한다고 말했으니까요. 그는 강한 갈릴리 억양을 없애고 싶어 했을 겁니다. 그들이, 젠장, “당신의 말씨를 들으니 분명하오.”라고 말했으니까요. 그리고 사람들이 모인 무리에서 사라질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알랑거리는 사랑으로 바라보고는 불길을 향해 나무 끄트러기를 하나 던졌습니다. 같이 불을 쐬었으니 그것으로 동료애가 약간 생기기에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그를 평화롭게 내버려 두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다른 비열한 사람들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정원에서 저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않았소?” 그러고 나서 그가 맹세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그리스도는 가 버리셨지만, 그에게 마지막으로 선물 하나를 남겨 주셨습니다.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눈물이라는 선물을, 수치심과 회개가 뒤섞인 열광을, 우리가 울음이라고 부르는 어린 시절의 복된 심연을요.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우리가 순수해지지는 않지만, 잠깐의 성스러운 순간 동안에는 진실해지고 기억과 희망에 가득 차게 됩니다. 그래서 선을 베풀어 우리를 울게 하는 것 말고는 모든 현실에서 자유로워지지요. 베드로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예전 삶 때문에, 소년일 때 저지른 이른 시기의 잘못 때문에, 마지막의 이 수치스러운 일 때문에 울었습니다. 또한 자신은 몰랐지만, 수천 년간 계속될 그의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이르신 바에 따르면 그를 뒤따르게 될 사람들의 부정과 실수와 겁쟁이 같은 행동 때문에 울었습니다. 그들한테는 그들을 정신 차리게 하려고 우는 닭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몽유병자입니다. 이 말이 우리 모두가 그 마당에서 서성이던 베드로처럼, 무의식적으로 말하고 행동하고 있다는 뜻입니까? 닭이 우리를 깨워 주어 우리가 눈물 속에 모든 내일을 지날 때까지는, 우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 단어 찾기
be done in 녹초가 되다
pull oneself together 튼튼하다 착실하다 정신차리다 가라앉다 진정되다
irritation 짜증 염증 화남 불쾌
cordial 정중한 따뜻한 진심의 성심껏
evaporate증발하다 사라지다
smarmy 윤기나는 지나치게 아첨하는 매끄러운
communal 공동의 공용의 공동 사회의
comradeship 동료 관계 우정 동료임
wretched 비참한 비열한
rage 분노 격렬 화 내다
intoxication 중독 도취 취함 술 취하게 함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루카 22,62)
예수님의 죽음이 시작된 밤 동안, 이 쓰라린 울음이 터져 나와 이야기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다시 울려 퍼졌습니다. 첫 번째 피가 정원에서 흘렀고, 첫 번째 구타가 저택에 있던 한 종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흐느낌은 나무 때는 곳 옆에서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날이 추워 종들과 성전 경비병들이 숯불을 피워 놓고 서서 불을 쬐고 있었는데, 베드로도 그들과 함께 서서” 불을 쬐었기 때문입니다.
수탉이 울었다는 이유로 한 남자가 울었습니다. 베드로의 닭은 새벽을 환호하며 맞은 게 아닙니다. 밤이 깊어도 아직 새벽이 먼 시간이었습니다. 그 닭이 예루살렘의 뒷마당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남모르게 사명을 받은 대로 스승의 계획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래서 몽유병자들을 깨우려고 딱 맞는 시간에 울기 시작했습니다. 닭이 두 번 울어야 했는데 두 번째 울 때 몽유병자가 정신을 차렸습니다. 마치 밤에 서성이며 돌아다니는 불쌍한 사람들처럼, 갑자기 깨어난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습니다. 마치 혈관에서 나는 피처럼 목에서 흐느낌이 울컥울컥 나왔습니다. 불가에 모인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이상하게 변하였는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사람은 자신이 그들 가운데 하나라고 설명하려 하면서 분노에 차서 공격적으로 말했습니다. 카야파의 종이, 그러고 나서 하녀가, 또 세 번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이 물어보았으나 소용없었습니다. 그는 그와 반대로 대답했습니다. “이 여자야, 나는 그 사람을 모르네. …… ” “이 사람아, 나는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 ” 그러고 나서 그는 그것을 끝내기 위해 맹세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목소리가 너무나 커서 그는 닭이 처음으로 울 때 듣지 못했습니다. 느끼는 거라고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과거에 대한 쓰라림 혹은 짜증이었습니다. 그리 재미없는 모험에 끼느라고 평화롭게 살던 어부의 그물을 버리고 떠난 것에 대한 감정, 그리고, 그래요, 그렇게 무서운 혼란으로 그를 끌고 간 떠돌이에 대한 감정이요. 심장과 위 사이에서 무엇보다도 느껴지는 것은, 두려움이라고 부르는, 얼음처럼 차가운 낙지icy octopus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칠면서도 정중한 수다로 그것을 깨부수려고 애썼지만 성공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왜 그분은 가 버려서, 그를 그 마당에, 틀림없이 이미 녹초가 되었을 다른 사람들이 밤을 새우는 곳에 붙잡아 두게 되었습니까? 하늘만이 그들이 그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베드로에게 무엇을 했는지 압니다. 베드로는 코와 수염 모양을 바꾸고 싶어 했을 겁니다. 그들이 계속해서 그를 기억한다고 말했으니까요. 그는 강한 갈릴리 억양을 없애고 싶어 했을 겁니다. 그들이, 젠장, “당신의 말씨를 들으니 분명하오.”라고 말했으니까요. 그리고 사람들이 모인 무리에서 사라질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알랑거리는 사랑으로 바라보고는 불길을 향해 나무 끄트러기를 하나 던졌습니다. 같이 불을 쐬었으니 그것으로 동료애가 약간 생기기에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그를 평화롭게 내버려 두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다른 비열한 사람들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정원에서 저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않았소?” 그러고 나서 그가 맹세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베드로가 화를 내고 나서 말없이 있던 침묵 사이로, 닭이 날카롭고 분명한 소리로 두 번째로 울었습니다. 베드로가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닭 우는 소리에 이어서 또 한 번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만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 분명한 목소리, 분명한 구절이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그는 어디서 그 말씀을 들었던가요? 저녁 만찬에서였습니다. 누가 그 말씀을 했던가요? 그분이 하셨습니다. 문 밖으로 나오신 분,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신 분, 단지 눈길을 한 번 주시고는 그의 너머로 눈길을 돌리신 분, 등을 돌려 경비병들과 함께 가신 분이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가 버리셨지만, 그에게 마지막으로 선물 하나를 남겨 주셨습니다.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눈물이라는 선물을, 수치심과 회개가 뒤섞인 열광을, 우리가 울음이라고 부르는 어린 시절의 복된 심연을요.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우리가 순수해지지는 않지만, 잠깐의 성스러운 순간 동안에는 진실해지고 기억과 희망에 가득 차게 됩니다. 그래서 선을 베풀어 우리를 울게 하는 것 말고는 모든 현실에서 자유로워지지요. 베드로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예전 삶 때문에, 소년일 때 저지른 이른 시기의 잘못 때문에, 마지막의 이 수치스러운 일 때문에 울었습니다. 또한 자신은 몰랐지만, 수천 년간 계속될 그의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이르신 바에 따르면 그를 뒤따르게 될 사람들의 부정과 실수와 겁쟁이 같은 행동 때문에 울었습니다. 그들한테는 그들을 정신 차리게 하려고 우는 닭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몽유병자입니다. 이 말이 우리 모두가 그 마당에서 서성이던 베드로처럼, 무의식적으로 말하고 행동하고 있다는 뜻입니까? 닭이 우리를 깨워 주어 우리가 눈물 속에 모든 내일을 지날 때까지는, 우리는 그런 존재입니다.
* 단어 찾기
be done in 녹초가 되다
pull oneself together 튼튼하다 착실하다 정신차리다 가라앉다 진정되다
irritation 짜증 염증 화남 불쾌
cordial 정중한 따뜻한 진심의 성심껏
evaporate증발하다 사라지다
smarmy 윤기나는 지나치게 아첨하는 매끄러운
communal 공동의 공용의 공동 사회의
comradeship 동료 관계 우정 동료임
wretched 비참한 비열한
rage 분노 격렬 화 내다
intoxication 중독 도취 취함 술 취하게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