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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모아 보자

사랑이 먼저 내게 다가왔다ㅡ김상용 신부님

by 봄날들판 2017. 2. 2.
예수회 김상용 신부님 시를 다시 가져왔습니다.
어떤 작은 수도 공동체가 떠오르는 시입니다.
차려진 밥상 앞에서 사랑을 묵상하는 신부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있으면
삶에 온통 가득한 사랑을 오히려 밀어내고 있는 내가 떠오르네요.
내 주변에 얼마나 사랑이 가득한지 감사하게 되네요. 

사랑이 먼저 내게 다가왔다
- 김상용 신부

낯선 집에 와서 하루를 보내고
아침에 일어나 식탁에 앉으니
정갈한 아침이 준비되어 있다.
보기에도 고급스런 접시 위에
싱싱한 오렌지의 껍질이
먹기 좋게 벗겨져 있었다.
이렇게 감미로운 아침에
나는 간밤을 기억했다.

어둔 밤
한가운데 나는
뭔가를 범했던 것 같다.
그것이 기억이 나질 않지만
이 무거운 가책이 그것을 증명하듯
가슴팍 가운데로
돌들이 밀려왔다.
뚜렷한 증거도 없이
책망의 기운이
나를 불안으로 누르고
나는 질긴 고문 끝에 자백하는
감옥수의 심정으로 그것을
원죄라고 불렀다.

생각이 이쯤 미치자 나는,
오로지 나를 위해 마련된 이 아침상이
그만, 자격이 없어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슬그머니 자리를 일어나
간밤에 왔던 그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사랑이 내게 다가왔다.

아침을 들고 기운을 차려
함께 산책을 다니자고.
근처의 숲이 넉넉히 깊어서
그 나무들의 향기를 분명 내가
좋아할 듯 보인다고.

나는 사랑을 향해 뭔가를 말하려 했다.
그리고 부질없이 의자에서 일어나자

사랑이 다시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지금 창밖
벚꽃나무 잎 사이로 부는 바람이
만일 이 자리의 내가 아니라면
기운을 다한 채 그저 해안에 머물러 있었을 거라고.
해안으로부터 만들어 온 이 산들바람은
오로지 지금 이 자리의 나 때문에
이역 만리 밖의 여정을 견디고
바로 내 눈앞 창 밖에서
가녀리게 잎사귀를 흔들며 나를 매혹시키는 거라고.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다시 사랑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부디 자리에 앉아
자신이 준비한 아침을 즐겨 달라고.

나는 순간, 사랑의 얼굴을 본 것 같았다.
그것은 처벌을 원하는 자의 분노도 아니고
심판을 기다리는 인내자의 굳은 표정은 더더욱 아니었고

사랑의 얼굴은 바로 사랑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의 시중을 받으며 천천히 그가 준비한 모든 것을
차례로 즐길 참으로 하얀 냅킨을 가지런히 무릎에 올렸다.
창 밖 벚꽃나무 가녀린 잎새들이 바람에 실려 서로를 애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