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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영성 영어 블로그 번역

어느 수사님의 묵상> 예와 아니요

by 봄날들판 2017. 6. 25.
수락과 거절

Eric Immel sj 수사님의 글
출처는 Jesuitpost에서
자신을 예스맨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못한 사람이 공감하기 좋은 글.

“평화는 ‘예’라고 응답할 때만 찾을 수 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말씀인 듯)

영적인 짧은 글귀를 모아 이미지로 만든 것 가운데서 이 평범하면서도 힘있는 만트라(mantra)가 빛나고 있다. 아니, 빛나는 정도가 아니라 울리고 있다. 나는 바쁜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피정에서 영적 지도를 시작하던 참이다. 참가자들은 대부분 전문직인데, 그들은 거룩함이라는 방향으로 조금 밀어 주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다. 나는 예YES라는 말을 떠올렸다. ‘예’에서 나는 평화를 얻을 수 있다. ‘예’에서 나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 ‘예’는 나를 구원할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예스맨’이었다. 한때 나는 대학교의 학생 기구에서 일했고 그 쉽고 간단한 말 주위에서 내 경력을 쌓았다. ‘물론이죠, 예. 이번 토요일에 당신이 준비하는 미사에 참석할게요. 아 물론이죠. 당신의 파티에서 덩크 탱크(큰 물통 위에 앉아 게임을 하는데 물속에 빠트리는 벌칙이 있음) 위에 앉을 게요. 아니면 내 얼굴에 파이를 던지게 해 줄게요. 아니면 12시간 자전거 마라톤에 참여하는 팀을 꾸릴게요. 아 물론이죠, 당신에게 두 번째 기회를 줄게요. 아 그럼요. 제가 다른 길로 돌아갈게요.’
이렇게 ‘예스’라는 대답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나는 또다른 ‘예’를 찾아 그 일을 떠났다. 수도생활을 할 것인지 깊은 질문을 하고 나서 ‘예’라고 대답한 것이다. 그리고 당신은 모르겠지만, 풀타임 직장에서 몇 년간 떠나 있다가 다시 풀타임 일을 시작했다. 그래서 젊은이들의 필요에 맞추어 주기 위해 새로 문 연 스타트업 대학에서 일한다. 여기 학생들은 가정 형편 때문에 고등 교육 학위를 얻는 데 큰 어려움이 있는 이들이다. 이곳에서는 모든 게 새롭고 모든 이가 무슨 일이나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대부분 경우에 ‘예’라고 대답하는 게 유일한 선택인 듯, 옳은 선택인 듯이 느껴진다.
그런데 나는 어째서 이렇게 평화를 얻기가 힘겨운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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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한 친구가 둘이서 이야기하자고 나를 부른 적이 있다. 당시 그와 나는 덴버에 있는 대학교의 기숙사에 살았는데 우리가 함께 마주 앉은 그날은 푸른 하늘에서 해가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 날이라 나는 멀리 산등성이 너머로 미지의 여행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내 마음속 눈에는 그곳에서 흑곰이 어슬렁대고 갈색 송어가 힘차게 헤엄치며 야생 블루가 익어 가는 광경이 선했다. 내 앞에서는 사람들이 잘 가꾼 잔디 위에서 프리스비를 하며 놀고 있었다. 나는 맨발 아래로 6월의 잔디에서 꺼끌꺼끌함을 실컷 느끼고 싶었다. 내가 아는 한 모임은 포트 콜린스에 갔다. 분명 그들은 새로 나온 에일 맥주의 신선한 냄새를 맡으며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와 있었다. 좋은 친구인 그와 함께 캠퍼스의 식당 밖에 있는 보잘것없는 철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나와 더 깊은 우정 관계를 맺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내가 너무 많은 사람에게 너무 많은 것이 되려고 하는 것 같아서 걱정이 된다고 했다. 그가 들어갈 자리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그에게 진정한 우정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는 나랑 그저 일 년에 몇 번 만나서 술이나 마시는 그런 친구가 되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사이가 더 가까워지도록 헌신하겠다고 기꺼이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예’라는 대답에 충실한 때는 한 번도 없다. 그것은 삼 년 반 전에 있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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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친구가 12월 중순에 나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송년 기도 예식에 어울리는 곡을 함께 준비할 수 있겠는지 물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해서 전화를 건 것이었다. 그는 내가 음악을 사랑하고 또 그것을 준비할 능력도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전화를 건 것이었다. 그는 내가 평소에 예스라고 대답하기에 전화한 것이다. 그러니 내가 안 되겠어, 라고 대답했을 때 그나 나나 둘 다 얼마나 놀랐을지 생각해 보라.
그의 목소리에 실망감이 묻어났다. 우리는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이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러자마자 나는 금방 허둥댔다. 나는 내가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다는 것을 그가 알아주기를 원했다. 그에게 전화를 걸어, 그를 버려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그 임무를 다 떠안겠다고 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전화번호를 찾는 동안 나는 마음속으로 운동 시간을 조정하기로 생각하고 시간을 만들어 내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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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하루에 25시간을 쓰는 것 같다. 내가 일주일 걸릴 일을 그들은 반나절 만에 해 치운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실망을 주는 법이 없고 그들은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그들은 항상 일을 완수해 낸다. 나는 내가 그런 부류에 속한 사람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전부를 해 내지는 못한다. 나는 예라는 대답을 즐겁게 그러나 부주의하게 해 버린다. 그리고 의도는 좋았지만 그 결과가 해를 미칠 수 있다. 일이 제대로 마쳐지지 않으면 나는 극도로 피곤해지고 사람들은 한참을 벤치에 않은 채 기다려야 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내 친구가 더 친한 우정을 맺자고 내게 요청한 일에 ‘예’라고 대답한 일이 떠올랐다. 지금 그와 나는 일상적인 관계 속에 있다. 옛 문이 새롭게 열렸고, 마침내 그와 더욱 가까워지고 싶다는 커지는 갈망과 그때의 약속에 충실하기로 한 몇 년 전 일이 떠올랐다. 내가 예라고 대답한 일에 내가 예전에 한 약속이 생각난 것이다. 당시에 내게는 그 약속을 지킬 힘도, 정직함도 없었다.
조금 후 음악을 부탁했던 친구가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내가 거절해서 고맙다고 말했다. 내가 다 손쓸 수 없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감사하다고 했다. 그는 내가 그를 실망시키는 게 나한테 힘겨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거절했다고 해서 우리 우정에 영향이 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어쨌든 그 ‘아니요’라는 대답에서 나는 평화를 얻었다.
매일의 결정에는 얼마간 슬픔이 담겨 있다. 어떤 일에 예라고 응답하고 나면 다른 일에는 아니요라고 거절하게 된다. ‘아니요’라는 응답으로 문이 열릴 수도 있고, ‘예’라는 대답으로 문이 닫힐 수도 있다. 나는 그 차이를 구별하는 법을 알아가는 중이다. ‘예’라는 대답에서 평화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때때로만 그러하다. 다른 때에는 ‘아니요’라는 대답에서 가장 큰 평화를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