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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시오 성인과 함께하는 31일 여정 번역

제22일 : 왜 기도하는가?

by 봄날들판 2018. 8. 10.

22: 왜 기도하는가?

Why Do We Pray?

 

우리는 왜 기도하는가? 실용적인 이유로, 그러니까 육체의 건강이나 정신의 건강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기도하는가?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종종 실용적인 이유로 기도한다고 이야기해야겠다. 우선, 청원 기도를 할 때는 대부분 나나 다른 사람한테, 또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결과가 생기게 해 달라고 청한다. 내게 아주 소중한 사람들을 기도 중에 기억하면 기도에 응답을 받지 못할지라도 만족감을 느낀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기도하는 내 모습에 기분이 더 좋아진다고 느낀다. 집중이 더 잘 되고, 현재와 조화를 이루며, 과거나 미래에 대해 불안감이 적어진다. 그래서 내가 심리적 건강이나 육체적 건강이라는 목적 때문에 기도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그런 동기가 내가 기도하는 이유에서 전부를 차지할까?

 

기도는 관계다Prayer Is a Relationship.

기도를 하느님과 나누는 의식적 관계나 우정으로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우리는 왜 좋은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가? 이 질문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내가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왜 기도에 시간을 보내는가에 제시된 이유와 왜 친구와 시간을 보내는가에 제시된 이유가 같은 점이 있다는 것이다. 친한 친구와 얼마간 기분 좋게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면 나는 마음이 불편해서 다소 외롭고 괴로울 것이다. 좋은 친구들과 있을 때는 더욱 온전하고 깨어 있음을 느낀다.

그래도 나는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유일한 이유가 기분을 더 좋게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친구들을 사랑하기에 그들과 함께 있고 싶은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친구들에게 관심이 있고 그들을 걱정한다. 그들과 함께 있음으로써 내가 얻게 되는 유익한 효과란 부수적으로 얻은 이점인 것이다. 게다가 문제가 생기기도 하고 시간이 소요된다는 희생을 치를 때에도 나는 자주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친구들이 내가 함께 있어 주기를 원하기에 그렇게 했다. 우리 모두 아프거나 우울한 친한 친구와 같이 시간을 보내지 않는가? 아무리 그 시간이 고통스럽고 힘들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보낸 시간은 실용주의적 이유로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친구를 위하기에, 친구를 사랑하기에 그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이다.

물론, 자신이 고통스럽거나 외로워서 친한 친구의 존재가 필요할 때가 있다. 우리가 상대방에게 주기는 하면서도 받는 것에는 절대로 자신을 열지 않는다면 그 우정은 상호 관계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완전히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관계에서 자신이 무엇을 얻을 수 있느냐 때문만이 아니라, 상대방 자체 때문에 상대방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서로 좋아하고 사랑하니까 친구들과 시간을 보낸다. 그렇다면 하느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을까?

 

가장 깊은 갈망 Our Deepest Desires

기도는 하느님과의 의식적인 관계이다. 친구를 사랑하고 좋아하니까 친구와 시간을 보내듯이,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함께하고 싶으니까 기도하는 시간을 보낸다. 사랑으로 창조된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향한 갈망에, 그리고 유일하게 우리의 가장 깊은 갈망을 채워 줄 궁극적인 신비와 하나 되려는 갈망에 이끌린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갈망이 우리 마음 안에 머무시는 하느님의 영이라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창조된 목적인 완전한 충만함으로, 말하자면 성삼위와의 공동체를 향해 우리를 이끌어 준다. 그 갈망은 하느님과 더 친밀하게 일치하도록 우리를 더욱더 이끈다.

그렇다면 가장 심오한 차원에서,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사랑의 유대에 이끌리기 때문이다. 단지 실용적인 목적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니까 기도하는 것이다. 만약 기도에 유익한 효과가 있다면물론 나는 기도에 효과가 있다고 믿는다.그것은 기도가 우리의 가장 깊은 현실에 잘 부합하기 때문이다. 하느님과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깊은 행복well-being  체험하지 않을 수 없다. 로욜라의 이냐시오 성인은 위로에 대해 말하기를, 한 사람이 하느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징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결국 연인은 위로를 얻기 때문에 사랑하는 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다. 연인은 사랑하는 이와 그냥 함께 있고 싶을 뿐이다.

 

감사와 찬미

기도하는 이유 또 하나는, 하느님의 크신 호의와 자비 때문에 그분을 찬미하고 그분께 감사하고 싶은 갈망이다. 예수님을 묵상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이 창조적일 뿐만 아니라 엄청날 만큼 자기희생적이라는 것도 발견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셨다.

우리가 모르는 것을 향한 갈망이 하느님과 내가 서로 사랑하는 관계로 점점 더 가까이 이끌어 주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자. 그러고 나면 내 생각에 우리는 아래에 나오는 참으로 아름다운 기도를 점차 자신의 기도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 기도문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이 쓰고 시인 제라드 맨리 홉킨스가 옮겨 썼다.

 

I love thee, God, I love thee

Not out of hope for heaven for me

Nor fearing not to love and be

In the everlasting burning.

Thou, my Jesus, after me

Didst reach thine arms out dying,

For my sake sufferedst nails and lance,

Mocked and marred countenance,

Sorrows passing number,

Sweat and care and cumber,

Yea and death, and this for me,

And thou couldst see me sinning:

Then I, why should not I love thee,

Jesus so much in love with me?

Not for heaven’s sake, not to be

Out of hell by loving thee;

Not for any gains I see;

But just the way that thou didst me

I do love and will love thee.

What must I love thee, Lord, for then?

For being my king and God. Amen.

 

God’s Passionate Desire by William A. Barry, SJ에서 발췌

(하느님의 간절한 열망과 우리의 응답, 바오로딸, 2000으로 출판된 적이 있는 내용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