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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기적: <예수님을 만나다> 번역

예수님의 기적 10_열린 곳에서 치유한 병자(치유 기적)

by 봄날들판 2018. 9. 27.

예수님의 기적 10_열린 곳에서 치유한 병자(치유 기적)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마르 6,56)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그리고 여러 사람, 많은 사람, 셀 수 없는 군중이라…….

그러면서도 이러한 기적을 그리스도께서 내어놓으신 신비한 표징으로서 체험한 적이 없는 사람은 이들한테 분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고는 울컥 화를 내며 신앙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이야기들을 그들은 빈정거리거나 업신여기는 웃음을 지으면서 듣습니다. ‘(기적적으로 치유받은 이들이) 많다면서 실제로는 왜 그렇게 적지? 수많은 사람들한테는 기적이 안 일어나고어째서 적은 몇몇한테 일어나는걸까?’ 침대에 깊이 누워 병원에서 불치의 병을 앓는 이라면, 그리스도께서 그분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한테만, 다시 말해 그분이 사셨던 역사의 작은 지역에서 태어난 이들한테만 신경을 쓰시는 것을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썼다는 이유로 나를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나 역시 이런 식으로 반응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나 역시 어째서 건강 회복과 행복이라는 그 작은 몫이 인간의 고통이라는 바다에서 코르크 부표처럼 떠다녀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릅니다. 그럴 때면 그 치유받은 수백여 사람들의 의의는 상징적이라고, 다시 말해 다른 모든 이를 위한 상징이자, 기적에서 배제되어 고통 속에 그대로 남겨진 이들을 위한 상징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적어도 그들이 믿음의 건강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려는 뜻이었습니다(결국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강하게 해 주시려고 치유해 주신 것이니까요.). 그래서 그리스도가 그들이 치유받고 또한 행복한 것을 보고 싶어 하시며 세상에 계셨다면 분명 그들에게 손을 대셨을 것임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치유할 수 있다는 그분의 갈망, 그분의 바람이 모든 이에게 마치 일반 약품처럼 가까이 다가가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잘 모르는 사람이긴 하지만, 어쨌든 병과 건강이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은 압니다. 어떤 날 아침이든지, 잠에서 깼을 때 유연하고도 멋지게 생긴 손발을 뻗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압니다. 그렇지만 침대에서 일어섰을 때, 다리가 중풍으로 마비된 모습을 발견하는 일이 없으리라고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지요. 아니면 거울 앞에 섰을 때 밤사이에 얼굴에 생긴 어떤 끔찍한 병의 증상을 발견하는 일이 없으리라고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고요. 엄청난 역설이기는 한데, 사람은 자신의 영혼의 지배자일 뿐입니다. 원하면 영혼을 구원할 수 있고 원치 않으면 영혼을 잃을 수 있지요. 그렇지만 사람은 자기 자신의 신체적 건강의 지배자가 아닙니다. 하루 종일 피가 도는 몸을, 신경의 망을, 뼈라고 하는 단단하지만 아주 무너지기 쉬운 발판을 지배하는 이가 아닙니다. 다른 이가 그 모든 것의 지배자입니다. 아마도 사람이 성부에 저항하여 함께 동맹을 맺은 이, 사람의 오래된 적으로 그가 있는 재난 관측소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몸의 고통을 집행하며, 쉴 새 없이 병을 연구하고 병을 늘어나게 하면서 각 사람한테 여기에 네게 주는 아픔이 있다. 바로 고통이지.” 하고 말하는 이이겠지요.

나는 압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거리를 지나실 때 이 알 수 없는 살인자들에 대항해 가차 없는 전쟁을 거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밤에 도시에 불빛이 전부 다 꺼질 때까지 손과 목소리를 이용하셨지요. 기적을 고안해 내신 것입니다.

병상, 들것, 밀짚으로 만든 침상, 그리고 나병 환자의 곪은 붕대, 열병의 열과 중풍의 차가움, 그리고 귀 먹고 말 못 하는 이의 새된 소리, 눈먼 이의 붉고 하얀 눈. 이러한 몸의 인간적인 비참함이 전부 그곳에 있었고 그분 주위에 꽉 들어차 신음소리를 냈습니다. 회의적이고 애원하였지만, 결코 고통에 몸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이런 이들 가운데 일부가 첫 번째 순교자들 중에 있게 될 것이고, 불평 하나 없이 죽음과 창으로 찌르는 것을 견디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들이라도 질병은 이겨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가진 큰 공포감에 대항하셨습니다. 그분은 거의 언제나 신비한 방식으로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손으로, 아니면 침으로 사람에게 손을 대기도 하고 숨을 불어넣기도 하셨지요. 그리고 다만 이방인 두 사람한테만(가나안 여자와 로마 제국 사람) 멀리서 그리고 마음으로 기적을 내리셨습니다. 그들의 믿음 때문이었는데 그 믿음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그것보다 더 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나가실 때 그것은 기쁨의 잔치가 되었고 욥의 한탄이 달래졌습니다. 그것은 가장 편안한 형태로 나타난 하느님의 행복이 되었습니다. 구원에 관해 낱낱이 아시는 분께서는, 아주 가난한 사람한테든 지위가 높은 사람한테든 그에게 병을 참아 견디십시오.” 하고 말하기보다 발포 분대로 가십시오.” 하고 말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우리는 영적 회심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떤 기적이든지 불필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에 복음이 불필요한 기적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율법을 인간적으로 만들려고, 사람에게 친절과 자비를 일깨워 주려고 그분께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자비란, 살아 있고 구약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만, 숨겨지고 잊혀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