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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기적: <예수님을 만나다> 번역

예수님의 기적 30_돌 아래 누운 친구(라자로의 부활)

by 봄날들판 2019. 4. 22.

예수님의 기적 30_돌 아래 누운 친구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와 그 여동생과 라자로를 사랑하셨다.(요한 11,5)

 

여행을 하다가 베타니아로 발길이 닿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할 수 있는 한 자주 그 집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세드론의 급류와 겟세마니의 언덕 사이에서 강하고 오래된 벽에 작은 문이 달린 집이었습니다.

그곳에 그들은 언제든 그분이 주무실 수 있게 침대를 마련해 두었고, 식탁에 그분의 자리가 있었으며 피로와 두려움을 견디도록 밤낮으로 타는 램프도 하나 있었습니다. 그 집은 페니키아의 위험하고 신뢰할 수 없는 경계에서 보였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만났을까요? 그분께서 그들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르타와 마리아와 나자로는, 그러니까 오빠와 두 누이는 부모가 돌아가셨습니다. 그 집에는 동년배 사이에 존재하는 신뢰를 불편하게 하거나 나이차를 일으킬 만한 어머니나 아버지가 없었습니다.

지친 손님에게 마리아의 관심사는 기쁨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말씀을 시작하실 때면 아름다운 머릿결을 가르마로 정돈하여 나누고서 그분 발치에 앉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집안일을 하느라 분주히 주변을 돌아다니는 마르타 또한 사랑하셨습니다. (마르타의 민감한 성격에 한 번 작게 짜증을 부리긴 했지요. 무얼 가지러 왔다가 여동생을 꾸짖었는데, 여동생이 할 일이 많은데도 여전히 초롱초롱한 눈으로 손님과 함께 있었거든요.) 예수님께서는 마르타가 내는 소음을 좋아하셨습니다. 부엌에 있어서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불에 저녁을 요리하는 모습도 좋아하셨지요. 그런 것도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어쩌다가 자매가 예수님을 집에 혼자 남겨 두고 나가서 그분이 피곤한 발을 펴고 주변의 가구에 눈길을 두기도 하면서 해질 녘 창문을 통해 빛나는 예루살렘을 향해 바라보기도 하는 일 말입니다. 그 평화로운 난롯가에서 보면 예루살렘이 마치 아름다운 꿈 같았지요.

라자로는 고향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라자로 역시 그분의 제자였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실수였습니다. 충분히 맞기는 하지만, 그날은 다른 많은 이들처럼 라자로가 기쁜 소식을 위해 순교를 맞이할 때 올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기쁜 소식을 그리스도는 결코 라자로에게 선포하지 않으셨습니다. 밭에서 돌아오면 라자로는 그분 어깨에 친구처럼 손을 올리고, 자리에 앉아 추수와 올리브와 그리고 마구간이나 목초지에서 새로 태어난 양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마르타가 그들 사이에 꿀술이 든 병과 잔 두 개와 빵과 저녁 식사로 먹을 저장식품을 놓았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식탁에 주사위를 놓아 주었지요.

라자로는 예수님을 스승이나 라삐,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냥 예수라고 불렀지요. 그리고 그냥 예수님은 그 집에 있을 때면 자기 집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인간의 면, 그러니까 굶주림, , 쾌활함이 쉽게 커졌습니다. 그것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선한 힘을 얻으셨고,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술인 우정을 마시셨습니다.

그분의 신성은 결코 그 문을, 그것을 담아 내지 못했을 작고 네모난 방을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마치 문간 밖에 남겨 둔 것 같았지요. 왕관은 너무나 눈이 부셨습니다. 그래서 베타니아의 그 집에 들어가실 때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모습이셨습니다.

그 집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지도, 기적을 일으키지도 않으셨습니다. 두 누이와 오빠는 그분이 그들의 식탁에서 가장 최근에 식사를 하고 나서 그분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았고 그분이 행하신 모든 행동을 하나하나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분께서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그저 평화와 너희와 함께, 나다.” 하고 말씀하실 때, 그들은 그분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고 말하였다.”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 기적에는 서문이 길게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추측을 하게 하지요. 라자로가 죽어 간다는 전갈(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병을 앓고 있습니다.”)이 온 때부터 예수님께서 베타니아로 떠나신 날 사이에는 며칠이 있었습니다. 라자로가 죽음의 고통 속에 누워 있고 마르타와 마리아가 간절하게 그분이 오기를 바라던 그 사흘 동안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미루고 계시면서 기억할 만한, 또는 특별히 필요한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듯했습니다. 그분의 조용함은 당혹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이 돌아오면 돌을 던져 버리겠다고 장담하던 유대인들을 두려워해서일까, 아니면 어떤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마음이 아주 무관심해진 탓일까. 사람들은 어느 것을 탓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두 감정 모두 아닌 것 같았습니다. 질문을 받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추상적으로, 종잡을 수 없거나 황당한 말씀으로 대답하셨습니다. 한번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라자로는 죽었다. 내가 거기에 없었으므로 너희가 믿게 될 터이니,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

사흘이면 긴 시간입니다. 태양이 천천히 하늘 아래로 지고 요르단 강의 다리 아래로 틀림없이 강물이 아주 많이 흘러 지나갔을 것입니다. 아무 일 없이 갈대밭에서 강물을 바라보는 어떤 사람, 그리고 죽음과 만날 약속이 되어 있는 어떤 사람에게는 특히 그랬겠지요. 눈 아래로 강물이 흘러갈 때 그리스도의 마음에서는 무엇이 흘러가고 있었을까요?

그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책에는 이 기적이 쓰여 있지 않았다는 점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의 친구들을 위해 세상에 파견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낫게 해 주신 병자들과 그분이 살려주신 죽은 이들은 모르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분께서 거의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나병 환자였으며, 이미 관에 들어가 있는 모르는 시신이었습니다. 포도주 몇 병과 두 척 배에 가득한 물고기 말고는 그분 자신의 사람들에게 많이 줄 것도 없었습니다. 그분 자신한테도 아무것도 줄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이 이유가 그분께서 요르단에서 시간을 지체하신 일을 가장 잘 설명해 줄 것 같군요.

저 역시 사람입니다. 아버지. 그리고 라자로는 그 어떤 것보다 제게 소중합니다. 제 벗이니까요. 당신의 뜻이었던 이 쓰라린 여정에서 작은 달콤함이었으니까요. 저도 압니다. 제가 베티니아로 성급히 달려가면 당신께서 제 손에 권능을 주실 것이고, 그가 무덤에서 일어나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그 기적을 오로지 저를 위해, 저에게 남은 얼마 안되는 날을 위해서만 일으킬 것입니다. 마냥 기다리면서 옆에 앉아 있을 불가가 없다면 죽음이란 너무나 차갑습니다. 당신의 책에 이 기적을 써 넣어 주십시오. 그렇지만 제가 그것을 저에게가 아니라 당신께 바치게 해 주십시오. 제가 사랑하는 그 사람을 제게 되돌려 주십시오. 마치 그가 이방인인 것처럼, 제 기억에서 그 즐거웠던 저녁이 지워진 것처럼, 제가 이름을 모르는 그 모든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이 그를 만들어 주십시오. 벗이 아니라 형제요 자매인 사람으로만요.’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해 주겠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분과 아버지는 하나이자 동일하니까요.

그러니 라자로는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돌을 치우는 장애를 지나면 그러고 나서 마리아와 마르타 역시 다시 기쁨이 샘솟을 것입니다. 한때 딱딱한 인형 같은 이가 다시 그들의 오빠가 될 것이고, 한때 그의 팔을 감았던 붕대가 다시 풀리고 그가 우느라고 멍해져 있는 누이들의 머리를 가슴에 꼬옥 끌어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왜 우셨습니까? 주님,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라자로가 이미 그가 있는 죽음의 관 속에서 숨을 쉬고 있었고, 당신이 하신 말씀이 참으로 맞아서 라자로는 다만 잠들어 있었는걸요...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우셨습니다. 얼굴이 온통 눈물범벅이셨습니다. 한 사람이 그의 뼈들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지만 죽음의 창살 너머에서 수많은 눈들이 전부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일어나지 못할 모든 망자들 때문에 울고 계셨습니다. 세상이라는 끝없는 묘지에서 그분이 옮겨 치울 수 없는 돌들 때문에, 꽃 한 송이 없이 잠든 사람들 때문에, 돌아온다고 해도 아무도 기다려 줄 이가 없는 이들 때문에 울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비유와 기적이 마를 수 없었던 강에는, 강에는 산 자와 망자를 나누는 다리가 없었습니다.

칼 블로흐 작품 
렘브란트 작품 

“돌을 치워라.” 

라자로 : 무슨 돌 말인가요? 당신과 나 사이에는 돌이 없었습니다. 우리를 가로막은 이 두꺼운 것은 이 돌이 아닙니다. 우주라는 끝없는 공간도 아니요, 몇천 년 세월의 엄청나게 빨리 지난 것도 아닙니다.

당신 때문에 내가 마음이 불편하군요.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저 군중도 모르고, 울면서 나에게 외치고 있는 저 두 여인도 모릅니다. 아치형 방의 어둠 속에서 이 나흘간 냄새가 지독해진 이 몸도 모릅니다. 내 이름은 라자로가 아닙니다. 나한테는 어떤 갈망도 없습니다.

내가 있는 곳에 아버지가 계십니다. 나는 그분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분은 바다처럼 투명해서 우리는 그분 안에 조개처럼 잠겨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몸부림이 다 끝날 때에, 우리의 화해가 다 끝날 때에 그분을 만나게 되겠지요. 는 그분에게 제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분도 생명을 얻기 위해 용서를 청하라고 내게 부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해악을 저질렀는데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는 삶이라는 벌을 주셨는데도 그분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서 보낸 날들이 있는데도 우리는 그분에게 감사해합니다. 당신이 헤아릴 수 없는 신비지요.

그렇지만 필요하다면, 그리고 당신이 원하니까 나는 돌아오렵니다. 이것은 당신을 위해서입니다. 당신한테 그 여인들이 인사불성처럼 울부짖는 소리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내가 누리는 자유보다도 중요하다면, 그렇다면 나를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 넣어 주십시오. 그래요, 돌을 굴려 치우십시오. 그곳에 너희들이 다시 있구나, 마리아와 마르타. 너희들은 너희들이 어떤지 모르지만, 나는 너희들을 보았다. ... 나는 너희들을 다시 사랑하려 애쓸 것이다. 너희들이 현명한 사람인 것처럼 너희들의 머리카락을 치고 인내할 것이고 너희들을 설득할 것이다. 나의 착하고 열광적인 누이들아, 왜냐하면 내가 있던 곳에서 너희들의 진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너희들의 손을 만지고 너희들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들어오십시오, 나의 좋은 친구 예수여, 나는 돌아와 다시 당신을 위해 문을 열었습니다. 당신을 위하여 나는 이 낯선 땅으로, 사람들이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땅으로 다시 내려왔습니다. 당신이 좋아하는 포도주가 어느 병에 들어 있는지 여전히 기억하니 며칠 동안 어울려 봅시다.

나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나는 착한 행동을 하는 체 할 것입니다. 돌이 치워지자마자 내리쬐는 태양, 사람이라 부르는 가면들, 빛과 공기의 향기에 나는 다시 살아나고 싶지 않았던 죽은 사람에서, 죽고 싶지 않아 하는 살아 있는 사람으로 바뀔 것입니다. 생명이 나를 다시 그 품으로 데려갈 것입니다. 삼목나무와 백단향 냄새가 그것과 관련된 추억과 함께 내 폐로 밀려들어오겠지요. 피가 다시 격하게 돌면서 얼어붙은 혈관에 오래된 열정을 다시 끌어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배고픔과 목마름을 느끼겠지요. 다시 한 번 죽을까 봐 두려워하겠지요. 왜냐하면 만약 나의 친구인 당신이 라자로가 저 불쌍한 죽은 이들 가운데서 곧바로 걸어나가기를 바란다면, 라자로의 비밀을 그한테서 지워 버릴 테니까요.

나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붕대를 없애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