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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시오 성인과 함께하는 31일 여정 번역

제28일 : 누구 말인가요? 저요?

by 봄날들판 2020. 4. 7.

28: 누구 말인가요? 저요?

Who, Me?

이 글은 책 <Ignatian Prayer Adventure>의 제5주간을 바탕으로 합니다.

복음에서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신 이야기는 수도 성소로의 부르심의 모델로 자주 인용됩니다. 분명한 부름(“나를 따라오너라.”(마태 4,19))과 모든 것을 버려두고 떠나는 형태를 취하는 즉각적인 응답이다(“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곧바로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마태 4,20, 4,22). 루카 복음에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5,11)

그렇지만 평생 수도생활에 헌신하도록 부르심을 받지 않은 사람들도 예수님을 따르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부르심은 우리 삶에서 다른 시기에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으며, 우리가 버려두도록 요청받는 것도 무척 다양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90세 나이에 어머니가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는데, 사라가 처음으로 보인 반응은 웃음이었습니다(창세 18,12 참조). 저는 70대 중반에 영적 지도자로의 부르심을 식별할 때 사라를 떠올렸습니다. 당시 제가 처음으로 보인 반응은 웃음이었지요. “누구 말인가요? 저요?” 그렇단다,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3년 동안 기도와 공부에 매진한 끝에 여든 나이에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삶에서 큰 변화가 일어날 때면 사람들은 자주 자신이 어디로 부르심을 받았는지 지문하게 됩니다. 은퇴, 모든 자녀의 출가, 배우자의 죽음, 또는 신체 장애 등이 일어날 때면, 모두 자신이 누구이며 하느님이 지금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시는지 고통스러운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 핵심 단어는 지금now’이라는 것입니다. 인생 후반의 어느 시기에 우리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일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어떤 은퇴자는 다른 이들에게 봉사하는 일에서 은총을 경험하고 어떤 이는 시간과 공간을 내어 새롭고 깊게 기도를 체험합니다. 사랑하는 이가 죽거나 장애를 겪게 되거나 자녀가 독립하는 등의 고통스러운 상실을 겪을 때 오는 부르심은 알아듣기가 더 어렵습니다. 우리 삶의 모든 주요 전환점은 하느님 중심의 삶에 대한 우리의 헌신을 새롭게 하고 모든 일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라는 요구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어떤 형태로든 우리의 부름에 대한 응답의 일부는 예수님의 수난에 함께 참여하겠다는 결심입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부르심이 있습니다. 삶에서 큰 전환점은 모두 하느님 중심의 삶(God-centered life)으로의 헌신을 새롭게 하라는 부르심입니다.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으라는 부르심입니다. 부르심에 우리가 드리는 응답은, 나이가 몇 살이든 어떤 종류가 되었든, 예수님의 고통에 함께 참여하겠다는 결심입니다.

부르심에 따르려면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얼마 전 은퇴자들이 주로 모인 기도 모임에서 몇 사람이 모든 것을 버렸다라는 구절에 불편한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어떤 사람이 가족을 부양할 책임이 있을 때 모든 것을 버려두고 떠나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렇다면 부르심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집이나 가족이 아니라 무엇이든 하느님과 더 완전하고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게 우리를 붙잡고 있는 것을 버려두도록 은 부르심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에 대한 애착일 수도 있고, 이제는 놓아 주어야 할, 오랫동안 깊숙이 자리 잡은 불평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손을 놓으라는 부르심에 응답한다면, 스스로 자유로워져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는다면, 사라와 아브라함이 놀란 것처럼 하느님의 놀라우신 분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누구 말인가요? 저요?”

그래요. 당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