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영화+콘텐츠 수다

2020년 4월에 뽑아 본 가톨릭적 시선 몇 가지 글

by 봄날들판 2020. 4. 20.

20204월 요즘에 읽은 글 중에서 괜찮은 글 모아 보았어요.

여러 교계 잡지에서 모았고요, 주로 신부님이 쓴 글이고 수사, 학자도 있어요. 하여간 가톨릭적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고민하고 아파하고 생각하는 좋은 글들을 모아 보았어요.

발췌만 하고요 원래 글은 링크에서...

 

[생활성서 20196월호]

되찾은 양의 비유

전원 신부님/ 서울대교구

https://blog.naver.com/biblelife83/221536425287 

... 이 시를 읽으며 문득 교회의 중심은 어디인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봅니다. 교회의 중심은 사제도, 주교도, 교황도 아닌, 바로 어린 양이 길을 잃고 헤매는 곳, 슬픔과 고통이 있는 곳, 가난한 이들의 자리, 그곳이 교회의 중심이라는 내면의 대답을 듣습니다. 교회가 이 중심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세상 속 시류에 흔들리게 됩니다. 사실 복음은 세리와 죄인, 온갖 병자들과 고통받는 이들을 찾아 나서는 착한 목자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착한 목자가 찾아 나서는 곳 그것이 교회의 중심이고 우리 신앙인의 마음이 머무는 곳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예수회 인권연대 연구센터 웹진 인연]

[인권] 결여된 희망, 코로나19와 가난의 자리

김우중 수사님/ 예수회

https://advocacy.jesuit.kr/bbs/?t=3f 

(전략) 필리핀은 하루 벌이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 주요 대중교통 수단인 지프니(미군이 남긴 지프 차량을 개조하여 만든 대중교통수단)와 트라이시클(오토바이에 사이드카가 부착된 필리핀의 주요 교통수단) 운전사들은 물론이고, 주일 미사 참석자들에게 양초와 묵주 등을 팔며 근근이 먹고 사는 사람들의 생계가 모두 끊겼다. 구걸도 할 수 없다. 정부에서는 주민들에게 식료품을 배급하겠다고 하지만, 주교님에 따르면 도시 빈민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10~20%는 아예 주민등록조차 안 되어있다고 한다. 조그만 방 하나에서 여러 명의 식구가 모여 사는 빈민가에서 사회적 거리유지는 불가능하다. 소독제와 마스크는 그들에게 사치나 다름없다. 굶주림은 그들에게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중략)

SNS에는 희망을 노래하는 메시지들이 공유되고 있다. 어떤 글들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대충 내용은 이러하다. 도시에 새소리가 들리고, 하늘이 맑아졌다는 것이다. 격리되어 외롭지만 자기를 돌아보고 상처가 치유되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맞다. 정말 그러하다. 적어도 제 1세계, The First World에서는. (후략)

 

[이냐시오 포커스]

김상용 도미니코 신부의 수도자 일기 3 - “본질의 비유

김상용 신부님/ 예수회

https://jesuit.kr/bbs/board.php?bo_table=share&wr_id=33

아이는 그렇게 나와의 짧은 만남을 선물처럼 주고 떠났다. 나는 내 손 안에서 서서히 그 체온을 잃어가던 아이의 고사리같은 손의 온도를 기억한 채 밤 늦게 공동체로 돌아왔다.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지만,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어서 밖으로 나와 새벽녘으로 치닫는 성곽길을 걸었다. 경황이 없이 거리로 나온 까닭에 웃옷을 걸쳐 입는 걸 잊은 채로 나온 탓에 아직 새벽녘의 기온은 쌀쌀했다. 그러나 내 손안에 여전히 감지되는 식어가는 어떤 존재의 온기가, 꺼져가는 불씨를 간신히 보호하고 있는 간절함 마냥 내내 지켜지고 있었던 덕에 나는 몸을 잔득 움추린 채로 미친사람처럼 어두운 서울 성곽길을 걸었다. 이제 제법 흐드러진 봄꽃들의 살랑임이 가로등 불빛에 건듯 시야에 들어올라치면, 어떤 새로운 생명에 대한 본연적인 비유처럼 비춰져서 그렇게나 한참 올려다보며 생애 처음으로 아이의 부활을 꿈꾸게 되었다.

 

[분도] 2020년 봄호 50

코로나-19, 멈추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 / 빵 좀 주소!

정은정 아녜스(농촌사회학박사)

http://ebook.cbck.or.kr/gallery/view.asp?seq=214767

아이가 초등학생 때 개신교회 신자인 친구를 미사에 데려온 적이 있었다. 영성체를 하러 나가는 아이에게 대체 뭘 너희들끼리만 먹으러 가느냐 물었고, 그냥 배운 대로 그리스도의 몸이라 대답하자 아이의 친구는 깜짝 놀라 고기 맛이냐 물었다. 교리 교사가 한참 설명을 했지만 가톨릭 미사의 그 구체적인 먹기 행위를 아이는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영성체는 미사 전례 중에서 가장 물질적이며 구체적인 행위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시간이기도 하다. 수십 년 외운 미사 통상문이 혀끝에서 자동재생 되면서 머리 따로 몸 따로가 주로 내가 봉헌하는 미사다. 그런데 영성체의 시간이 오면 머릿속에서 동동 떠다니던 일용할 양식의 의미가 훅 다가온다. 말씀이 사람이 된다는 뜻은 죽었다 깨어나도 몰랐지만 그 사람이 이렇게 빵조각으로 쪼개지고 내 혀에서 으깨지는 시간만은 그냥 느끼는 시간이었음을, 이제야 알았다. 그 빵은 온전한 그리스도의 선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 빵을 먹고 힘을 내서 세상 밖으로 나가 신나게 살아보라는 응원이자 힘찬 파견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52-53쪽에서)

 

[한국일보] 2018.12.06

삶과문화 / 까짓것

김찬선 신부님 / 작은형제회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812051110722257?did=NA&dtype=&dtypecode=&prnewsid=

저보다 나이가 많거나 저와 연배가 비슷한 세대는 갑돌이와 갑순이라는 노래를 아실 겁니다. 그 가사의 일부는 이렇습니다. “갑돌이도 화가 나서 장가를 갔드래요. 장가간 날 첫날밤에 달 보고 울었드래요. 갑돌이 마음도 갑순이 뿐이래요. 겉으로는 음음음 고까짓 것 했드래요.” 이 노래에서 갑돌이와 갑순이는 서로 사랑하지만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각기 시집장가를 가고 그래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생각하며 울게 되지만 겉으로는 그까짓 것함으로써 문제를 넘어갑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이 노래를 인용한 것은 까짓것의 삶을 얘기하기 위해섭니다.


(계속 추가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