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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냐시오 성인과 함께하는 31일 여정 번역

제24일 : 소셜 미디어의 댓글을 볼 때 도움이 되는 이냐시오 성인의 가정과 의도

by 봄날들판 2021. 2. 10.

제24일 : 소셜 미디어의 댓글을 볼 때 도움이 되는 이냐시오 성인의 가정과 의도
Ignatius’s Presupposition and Intent in a Social Media Comment
By Cara Callbeck

 

페이스북 화면에서 그 댓글들은 나를 쳐다보며 한꺼번에 조롱과 칭찬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옛친구들과 함께 고향에서 열린 축구 경기를 보러 여행을 갔다가 막 돌아온 참이었지요. 내가 응원한 팀은 지금 사는 도시의 경쟁 팀이었습니다. 내가 경기 사진을 올렸을 때 한 지인이 당신은 대단해, ​​카라, 정말 대단해.”라고 댓글을 달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짧은 댓글로는 어조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때가 많고, 내가 댓글을 쓴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은 피상적인 수준이었어요. 그래서 그 댓글이 칭찬인지, 비꼬는 것인지, 아니면 축구에 과도하게 빠진 사람의 생각인 건지 몰랐습니다. 칭찬인 양 하는 그 댓글은 내가 댓글의 진짜 본질을 며칠 밤을 계속해서 고민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왜 그렇게 댓글을 중요하게 여기게 두었는지 궁금했습니다.

댓글에 대해 생각해 보는 동안 의도에 관해 영신수련과 이냐시오 성인의 지시에서 피정자에게 말하는 바가 떠올랐습니다. “선량한 그리스도교 신자는 누구나 다 남의 의견을 처단하기보다는 그것을 살리는 데로 마음을 기울여야 하고, 또 그것을 살릴 수 없는 경우에는 그의 생각을 고찰해 보아서 그의 생각이 그릇된 것이면 애덕으로 그를 고쳐 주어야 한다. 그래도 안 되면 그가 바로 깨닫고서 자기를 구할 수 있도록 모든 적절한 방법을 찾아보아야 한다.”(영신수련 22)

내가 대부분 상황에서 가장 나쁜 방향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을 인정하는데, 이번에도 다를 바 없었습니다. 댓글 때문에 며칠 동안 힘들어한 후 마침내 영신수련에서 주는 조언에 따라 댓글을 비난의 뜻보다는 칭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댓글의 본질은 오로지 내가 그것을 어떻게 인식하기로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댓글에 잠재적으로 숨어 있는 악의를 생각하다가, 나 자신의 의심과 불안감 때문에 다른 사람이 주는 선물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변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은 사람이나 상황에서 선함을 찾는 것과 관련이 있기도 합니다. 가장 선함을 가정하거나 선함을 추구하기란 분명 도전입니다. 부정적인(또는 잠재적으로 부정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려는 유혹이 있을 때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 잠재적인(potential) 선에 눈이 멀어지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소중히 여기지 못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요.

그래서 내가 어쩌면 그 친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서 그녀가 쓴 댓글처럼 나를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 것에 대해 나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의 의도가 아니라면 미래의 나의 행동으로 인해 언젠가 나에 대해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당연해지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