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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복음의 예수님을 되삶

by 봄날들판 2022. 4. 10.

블로그지기 주 : 거창하게 아카이브라고 이름 지었는데, 모아 놓는다는 의미입니다. 
최시영 신부님의 강론이나 강의 자료를 여기저기서 찾아서 한데 모아 놓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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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서울대교구 사제피정(단체 1차) 자료입니다. 서울대교구 사제평생교육원 홈페이지에서 옮겨왔습니다.

주제 : 복음의 예수님을 되삶

지도 : 최시영 신부(예수회 수련원장)
기간 : 2000년 5월 3일 - 10일
장소 : 의정부 한마음 수련장

목차

5월 3일 주제 : 기다리는 마음 (허준의 동의보감)

5월 4일 주제 : 내가 찾던 분, 그러나 누군지도 모르면서 찾아왔던 분

5월 5일 주제 : 우리의 현실(아시아에서 발견되는 거대한 흐름)

5월 6일 주제 : 회심

5월 7일 주제 : 價値觀의 顚倒

5월 8일 주제Ⅰ: 치유 / 주제Ⅱ: 수난

5월 9일 주제Ⅰ: 부활, 승천, 성령강림 / 주제Ⅱ: 전인적인 투신 / 주제Ⅲ: 생활 개선

2000년 서울대교구 사제피정 (단체1차)

주제 : 복음의 예수님을 되삶

□ 지도 : 최시영 신부 (예수회 수련원장)

□ 기간 : 2000년 5월 3일 - 10일

□ 장소 : 의정부 한마음 수련장

 

서울대교구 사제평생교육원

- 목 차 -

< 5월 3일> □주제 : 기다리는 마음 (허준의 동의보감) ․․․․․․ 1

< 5월 4일 > □ 주제 : 내가 찾던 분, 그러나 누군지도 모르면서 찾아왔던 분 2

< 5월 5일 > □ 주제 : 우리의 현실(아시아에서 발견되는 거대한 흐름): ․․ 6

< 5월 6일 > □ 주제 : 회심 ․․․․․․․․․․․․․․․․․․․․․․ 11

< 5월 7일 > □ 주제 : 價値觀의 顚倒 ․․․․․․․․․․․․․․․․․․ 19

< 5월 8일 > □ 주제 Ⅰ : 치유 ․․․․․․․․․․․․․․․․․․․․․․ 23

□ 주제 Ⅱ : 수난 ․․․․․․․․․․․․․․․․․․․․․․ 27

< 5월 9일 > □ 주제 Ⅰ : 부활, 승천, 성령강림 ․․․․․․․․․․․․․․ 30

□ 주제 Ⅱ : 전인적인 투신 ․․․․․․․․․․․․․․․․․ 31

□ 주제 Ⅲ : 생활 개선 ․․․․․․․․․․․․․․․․․․․ 32

< 5월 3일 >

□ 주제 : 기다리는 마음 (허준의 동의보감)

*** Orientation

1. The decisive element is the Power of God.

피정 지도자는 하느님 (결정적인 요소는 하느님께)

피정은 하느님과 신부님들 사이에서 진행.

(책임은 피정하시는 신부님께 90%)

피정 도와주는 사람은 이 만남을 주선하는 심부름꾼 (책임은 10%)

2. 기도 안내:

1) 기도 방식:

- 잠심하는데 가장 적합한 기도 방식을 택할 것. (lectio divina ---)

- 만약 원하신다면 이냐시오 성인이 초대하는 기도 방식으로 기도.

기도 준비: 요점 세 개

준비기도/길잡이(장소구성과 청하는 은혜)/ 요점/ 담화와 주의 기도

2) 몇 번 기도할까?

- 신부님들 내면의 흐름을 존중

- 그러나 대략 하루에 네 번 혹은 다섯 번의 기도 시간을 할애

3. 주의:

- 많은 양보다 충실히 음미하는 것이 영혼을 더 풍족하게 한다.

- 내면에 움직임이 있는 곳에서 충실히 머물고, 여운이 있는 한 되풀이 기도

- 가능하면 성서 text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것을 중심으로 요점 을 취함.

*** 기도 자료 :

- 이사야 55, 1-12; lectio divina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스승의 증언을 듣고 예수라는 청년을 뒤따라갔던 요한 과 안드레아도 허준과 같은 사람, 즉 메시아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던 사람들이었 다. 나는 무엇을 찾고 있는가? 예수님의 물음에 무엇이라 대답하겠는가?

- 요한 1,35-39; 예수의 첫 번째 제자

- 루가 5,1-11; 깊은 곳으로--

< 5월 4일 >

□ 주제 : 루가 6,27-36

내가 찾던 분, 그러나 누군지도 모르면서 찾아왔던 분.

루가 복음 6장 27절에서 36절의 말씀을 읽고 오늘 강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 말을 듣는 사람들아, 잘 들어라.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에게 축복해 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어라. 누가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 주고 누가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마저 내어 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빼앗는 사람에게는 되받으려고 하지 말라.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너희가 만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 너희가 만일 자기한테 잘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해 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너희가 만일 되받을 가망이 있는 사람에게만 꾸어 준다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것을 알면 서로 꾸어 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해주어라. 그리고 되받을 생각을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며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 그러니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잠깐 동안 묵상합시다.

저희 수도원에서는 수련을 세 번을 받습니다. 수도회에 입회해서 처음의 한 보름정도를 제1수련 기간이라 하고, 나머지 2년간을 제2수련 기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제가 된 후 한 몇 년 동안의 사목경험을 하고 난 다음에 수련을 한번 더 받게 됩니다. 그것을 제3수련 기간이라고 합니다. 저의 경우에는 제3수련을 1994년 9월부터 1995년 3월까지 마닐라에서 받았습니다. 그 제3수련 기간 중에 한 달간 피정하는 기간이 있었습니다. 1994년 10월 말에서 11월 말까지 한 달 피정을 받았는데 그 피정 중에 제 피정을 도와주시던 제3수련장 신부님께서 제게 주신 기도 제목 중의 하나가 방금 읽은 루가 복음 6장 27절에서 36절이었습니다.

피정을 시작해서 한 열흘이 되던 때였습니다. 아침에 피정자료를 가지고 기도를 시작했는데, 제가 기도자료로 선택한 것이 이 구절이었습니다.

그날 하루종일 이 구절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꼬박 이틀 동안을 이 구절에만 머물러 있게 되었습니다. 왜 힘들었는가 하면 사제로서 살아가다 보면 수도회 안에서도 후배들과 함께 나누면서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야 하고 가끔은 평신도들을 만나거나 피정을 도와줄 때 “서로 사랑하십시오.” 때로는 성직자들, 수도자들 앞에서 “서로 사랑하십시오.”라고 말해야 할 시간이 주어질 것이라는 이유 때문에 이야기해야 하는 저의 신분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의 신원에서 요청되는 이런 삶, 즉 서로 사랑하라는 이 삶을 저 자신뿐이 아니라 이웃들에게도 초대해야 되는 신원으로서의 저의 삶인데 피정하면서 제가 느꼈던 것은 과연 제 자신에게 이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는가의 문제였습니다.

저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는 잘해 줄 용의가 있고, 저에게 호의를 가진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 용의까지는 있겠는데, 과연 저를 박대하고 외면하고 배척하고 저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에는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사제이기에 분명히 이런 경우가 생길 것이고 이웃들을 사랑으로 초대해야 하는데 과연 이 초대하는 내용을 지금의 내 자신이 살아가기 힘들다고 한다면, 적어도 그렇게 살아가고자 하는 원의들이 내 안에 얼마나 있는가 하는 질문들이었습니다.

이 초대 앞에서 힘들지만 이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원의보다는 힘듦이 너무 크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하루를 꼬박 힘들게 보낸 후 오후에 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오후 미사 시간쯤이 되어서는 마음만 힘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부담이 되었든지 심장까지 죄어 오는 듯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겁이 났습니다. 이러다가는 피정을 더 이어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미사가 끝나면 3수련장 신부님을 만나 뵙고 내 상황을 말씀드린 후 피정을 중단하리라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미사에 참석했고, 미사가 끝난 후 3수련장 신부님을 만나뵈러 가기전에 그곳에 널찍한 정원이 있었는데 그 정원을 잠시 산책하며 그 구절을 다시 한 번 돌이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힘들게 다가오는가? 물론 제게 그런 힘이 없다는 것은 받아들이겠지만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을 복음이라고 이야기하는가였습니다. 저에게는 그 구절이 너무나 힘들게 다가왔기에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넓은 정원을 산책하며 이렇게 힘들게 다가오는 것은 지금 내가 뭔가 잘못 이해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어, 신부님을 뵈러 가기 전에 이 구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려고 다시 제 방으로 돌아와서 천천히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이 구절을 읽으면서 참으로 놀랐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놀랐느냐 하면 우선 제가 그렇게 힘들었던 이유는 예수께서 그렇게 초대하시기 때문에 제가 이런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제게 크게 다가왔었는데 다시 읽었을 때는 조금 다른 시각에서 읽혔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서로 사랑하십시오. 원수들까지도 서로 사랑하십시오.”라는 초대를 하시기 훨씬 이전에 벌써 우리를 이렇게 사랑해 오셨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제가 그분을 잘 모르고 다른 어떤 것을 선택했던 시간들에 있어서도, 내가 이웃을 아끼고 사랑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웃에게 군림하고, 이웃을 아프게 했던 시간 속에 있었을 때도 예수님은 끊임없이 제게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를 이렇게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을 생각하고 참으로 놀랐고, 그날 많이 울었습니다. 한참 울면서 생각해 보니까 내가 찾고 있던 분이 바로 이런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령 내가 그분을 알아뵙지 못하고 사랑하기보다는 그분을 미워하고, 이웃을 미워하고, 가치롭고 올바른 것을 선택하기보다는 나의 욕심을 선택하고 나의 욕망을 선택했던 순간들, 되돌려 받을 가망이 전혀 없었는데도 계속 저에게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주셨음을 느꼈을 때, 내가 찾던 분이 바로 이런 분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때 이미 저는 수도생활을 16년 가까이 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그 의문이 들며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한 16년 가까이 수도생활을 해왔지만 오늘 이 구절을 통해서 내가 찾고 있던 분이 바로 이런 분이라는 것을 비로소 조금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었는데, 그러면 이전의 십몇 년 동안의 수도생활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사실 15, 6년의 수도생활 동안 제가 찾고 있던 분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살아왔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제가 의식하지 못하며 살아왔던 시간들이었죠. 물론 제가 찾고 있던 분이 어떤 분인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는 교리를 통해 배웠지만 그날의 제가 느낀 그분은 교리적인 지식이 아니라, 제 삶에 마음에 와닿은 분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는 종일 힘들어서 지내다가 그 다음날 하루는 너무나 감사로워서 이 구절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찾던 분을 만났다는 것도 감사로웠고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도 감사로웠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 가운데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택하라고 하면 1994년 11월 바로 그날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앞으로 하느님께서 얼마나 더 큰 선물을 주실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러나 지난 제 삶 전체를 돌아볼 때 가장 행복했던 시간, 가장 기뻤던 시간은 바로 제가 찾던 분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고, 만나게 되었던 시간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 신부님들께 초대해 드리고 싶은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 오셨고, 지금도 사랑하고 계시고, 앞으로도 어떻게 계속 사랑하고 계실지 하느님의 사랑 앞에 머물러 계시는 시간을 가져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 존재 깊숙한 곳에는 우리가 알기 훨씬 이전부터 누군가를 찾고 있습니다. 제 자신의 삶도 그랬습니다. 수도생활 15, 6년을 하면서도 제 의식적인 차원에서는 제가 찾고 있는 분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제 의식보다 더 깊은 곳에 존재 자체의 그 깊숙한 곳에서는 어떤 분을 찾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분을 찾고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누구신지도 모르는데도 이런 삶을 십몇 년을 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저의 피정 얘기로 돌아가서 피정이 끝나고 1995년 1월 어느날이었습니다. 그날의 복음이 요한 복음이었는데 요한 복음 1장 29절에서 34절의 말씀입니다.

 

다음 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한테 오시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내가 전에 내 뒤에 오시는 분이 한 분 계신데 그분은 사실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계셨기 때문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분을 두고 한 말이었다. 나도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 그러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푼 것은 이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는 것이었다.” 요한은 또 증언하였다. “나는 성령이 하늘에서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와 이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분이 ‘성령이 내려와서 어떤 사람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인 줄 알라.’고 말씀해 주셨다. 과연 나는 그 광경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증언하는 것이다.”

 

이 구절을 보면서 1994년 11월에 가졌던 시간들에서 제 삶에서 제가 찾던 분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이런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게 다가왔었는데 세례자 요한의 고백을 들으면서 세례자 요한도 이분이 누구신지 몰랐다고 거듭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세례자 요한은, 누구신지도 모르는 그분을 위하여 광야로 들어가 고행했고 온 유다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이 세례자 요한의 고백을 들으면서 이것이 나만의 체험이 아니라 세례자 요한의 체험이기도 했고, 어쩌면 우리들 모두의 공통된 체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알기 훨씬 이전부터, 설령 우리가 몰랐다고 하더라도 우리들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이미 이분을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는 하느님의 사랑 속에 깊이 머무르시고, 또 신부님들 한 분 한 분의 삶 가운데서 어떻게 하느님을 찾아오셨는지, 그 두 가지 측면을 묵상해 주시기 바랍니다.

즉 하느님의 사랑, 은총이라는 측면과 이 하느님의 사랑 앞에 나 자신은 어떻게 반응하여 왔는가입니다. 기도하실 자료는 루가 복음 6장 27절에서 36절과 마태 복음 13장 1절에서 9절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입니다.

이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도 하느님의 은총이 어떤 것인지 우리들에게 잘 드러내 주는 대목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비나 햇빛처럼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모두에게 다 내리고 비추어집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 씨뿌리는 사람도 그 밭이 어떤 밭인가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씨를 훌훌 뿌려 주십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좋은 밭에만 씨를 뿌리고자 하신다면 우리들 중의 많은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의 씨앗을 느끼거나 구경조차 하지 못하고 삶을 마치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은 인간이라는 그것 하나, 피조물이라는 것 하나로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충분한 가치가 있고 존엄성을 갖고 있는 존재로 보고 계신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몇 편을 적어 놓았습니다. 시편 121, 이사야서 43, 호세아서 11장입니다.

성서 자료로는 이 세 부류를 드리겠습니다. 이 세 가지 가운데서 하나를 선택해도 좋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 지나시면서 여유가 되면 신부님 자신들의 살아오셨던 삶의 여정을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선 첫번째로는 지금까지 가장 힘들었고 고통스러웠던 시간들이 있었다면 언제였는지, 그때 무엇이 일어났는지, 왜 그토록 힘들었는지 한번 되돌아보아 주십시오. 둘째 질문은 지난 나의 삶 가운데서 가장 행복했고, 의미 있었던 때가 있었다면 그때는 언제였는지, 그 당시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나는 지금 이 두 가지 체험들 가운데서 무엇을 배웠고, 하느님께서 이 두 가지 사건을 통해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해 주셨는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들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제 자신의 삶을 보아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느끼게 되는 것은 물론 행복하고 기뻤던 시간들이 우리 삶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의미 있고 행복했던 일들이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를 힘들게 했던 시간들도 우리에게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를 기쁘게 했던 것들은 우리가 그렇게 억누르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자신에게 느껴지도록 쉽게 허용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들은 우리에게 느껴지도록 잘 허용하지를 않습니다. 하지만 허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를 떠난 것은 아니지요.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서 알게 모르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긍정적인 부분 안에서도 우리 안에서 힘차게 활동하시지만 부정적인 삶 속에서도 힘차게 활동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좀더 관대한 마음으로 우리의 긍정적인 삶뿐 아니라 부족함, 나약함, 상처, 죄, 이런 부분들에서도 하느님께서 활동하실 수 있도록 양편에 모두 시간을 안배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도 자료의 각 구절들 안에서 신부님들께 의미 있게 다가오는 것이 있다면 거기에 충실히 머무시는 것이 우리 영혼을 더 풍족하게 해주리라 생각됩니다. 하루에 서너 차례 기도해주시고 나머지 빈 시간들, 빈 공간들을 마련하셔서 하느님께서 그 시간에 활동하실 수 있도록 시간을 안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 기도 자료 : 1. 마태오 13,1-9 씨뿌리는 사람들

2. 루가 6,27-36 은혜를 모르는 자들, 악한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

3. 시편 121 / 125 / 144

이사야 43

호세아 11

 

 

 

< 5월 5일 >

 

□ 주제 : 우리의 현실(아시아에서 발견되는 거대한 흐름): Mega Trends in Asia (cf. FABC)

 

안녕하십니까?

오늘의 주제로는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대하여 한 부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동아시아 지역에 있는 저희 수도회 수련장들은 일년에 한 번 정도 모여서 수련원 양성에 관해서나, 또는 다른 다양한 주제들을 가지고 한 주일 동안 강사 신부님을 초대하기도 하고, 저희끼리 나누는 모임을 가지고 있는데, 지난번에는 태국에서 그 모임이 열렸습니다.

이 자료는 그때 강사 신부님으로 오셨던 일본 관구에 계시는 니콜라스 신부님이 마침 저희 모임에 오시기 전에 아시아 주교회의에 참석하셨다가 거기에서 나온 자료를 하나 소개해 주신 것입니다.

주제는 (Mega Trends in Asia Communication challenges for the Church)라는 아시아에서 발견되는 거대한 흐름들을 10가지 정도 뽑아 놓으신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아시아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거대한 10가지 흐름들을 분석하셨고 그 가운데 하나의 주제는 전통이라는 것, 가정 안에서의 전통, 가족 안에서의 경로사상, 효도, 선생님에 대한 존경 같은 우리 사회 안에서 통용되던 전통이 있었는데 지금 현대 아시아의 사회에서 보면 이런 전통들이 우리 사회에 우세하게 작용해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영향을 주던 사회는 이미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오히려 전통이 우리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보다는 각 개인들과 그 개인들이 소속되어 있는 집단들, 공동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우리 사회에 더 큰 영향력을 주고 있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뉴스에서 보도된 사건에서 보면 일본의 한 고등학생이 사람을 죽인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느껴 보고 싶어서 길을 가다 어느 집에 들어가 60대의 할머니를 죽였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도 다양한 청소년들의 문제점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이런 청소년들이 살아가는 지금의 우리의 사회와 우리들이 살아왔던 사회와는 많이 다릅니다.

옛날 우리들은 전통적인 가치관이 우리를 보호해 주던 사회를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청소년들에게는 더 이상 그들을 지켜 주는 가치관, 울타리가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양한 선택 쪽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청소년들의 문제를 보면서 그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쏟기보다는 조금 더 진지하고 정직하게 우리의 사회를 들여다보면 결국 그들은 우리의 자화상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에게는 전통이라는 것이 우리의 부모님들과 선조들로부터 전해져 왔고 그것이 우리를 지켜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전통이 어디로 갔습니까?

누가, 어떻게 했습니까? 결국 우리입니다. 우리 기성세대가 잘 살아보자는 기치를 내걸고 전통이라는 것을 하나, 둘 없애 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청소년들이 살아가는 사회는 전통이 없고 울타리가 없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요즘 청소년들에게 주어지는 매스컴의 홍수들은 무차별 폭격이라고까지 이야기들을 합니다. 청소년들이 과연 다양하게 들어오는 이런 정보들을 자기 스스로 정리하고, 식별하고, 취사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요? 물론 없습니다. 그런 능력이 없는 그들이 이렇게 무차별적으로 주어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아가고 있으니, 우리의 청소년들이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기가 참으로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나오는 반응이 다양한 선택이지요. 지금 우리의 교육현장이나 그 외 다양한 곳에서 벌어지는 현상은 청소년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탓이 아니라 결국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우리의 탓입니다.

아시아 주교회의에서 나온 이 자료에서 보면 전통이라는 것이 우세하게 작용하던 사회에서 다양한 선택이 작용하는 사회로 넘어감이 우리 교회에 어떤 도전이 되는가 하는 점을 몇 가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교회는, 특히 그리스도인의 대중매체들은 전통의 가치들을 밝히 드러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새로운 발전들을 잘 식별할 수 있는데 도움을 주어야 할 것이라고 초대하십니다. 특히 두 번째로 젊은 사람들은 이렇게 다양한 사회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도움과 인도를 필요로 하기에 우리 교회는 이들의 동반자가 되어야 하고 이들을 인도해야 한다고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인 신앙과 비전과 원칙에 입각해서 이런 다양한 선택들의 밀림 가운데서 지도자, 인도자, 길을 밝혀 주는 역할을 하여야 한다고 초대하십니다.

이것 외에도 다양한 흐름들이 있겠지요.

전통이 우리의 사고행위에 영향을 미치던 사회에서 다양한 선택이 주류가 되는 사회로 넘어간다는 것은 제가 보기에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즉 전통이 우세하게 작용하던 사회에서는 어쩌면 개인의 창의성, 존엄성, 개인의 가치는 전통에 억눌려 있을 수도 있는 상황이 초래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개인이나 단체, 공동체가 성숙하지 못하면 전통이라는 것은 개인을 활발하게 꽃피워 주기보다는 개인을 억압하는 역할을 하게 되기도 하니까요.

성서에서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런 부정적인 영향을 받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전통이 강조되는 사회에서 다양한 선택으로 넘어가게 되면 개인의 존엄성과 창의성이 더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긍정적인 측면이라고 봅니다. 동시에 부정적인 면은 다양한 선택이 우리에게 열려 있을수록 우리에게 그만큼의 책임감이 요구됩니다. 선택만 하고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를 점점 더 비인간화시키고 미성숙하게 하는 쪽으로 영향을 줄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하느님의 말씀의 가치관으로써의 전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 동산에서 살게 하셨지만 선악과에는 손대지 말라고 초대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전통에 머물기보다는 그들의 선택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비록 하느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자기들이 선택하여 선악과를 따먹게 됩니다. 선악과를 따먹게 되는 상징적인 행위의 이면을 우리가 들여다보면 표면적으로는 좋은 것처럼 보입니다. 인간도 선과 악을 구분하게 되면 선은 알아서 행하고 악은 알아서 피하면 될 것이 아닌가라는 논리가 성립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나 더 이면에는 이제 더 이상 하느님 당신만이 우리의 사고행위를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은 아니라는 사고가 깔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선과 악을 식별하는 것이 당신에게만 달려 있지 않고 이제 우리에게도 달려 있고, 결국 나에게도 달려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에게 이런 선택은 열려 있었지만 오히려 선택을 통하여 죄의 상황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런 우리의 현실을 감안하시고 창세기 3장에서 나오는 하와의 타락 부분이나 마태오 복음 25장 열 처녀의 비유나 혹은 최후의 심판 장면을 선택하셔서 기도 자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이 마태오 복음 최후의 심판 장면에 보면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전통적인 가치로서 우리에게 제시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초대는 우리가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좋은 초대가 아니라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전통과 가치로써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양과 염소로 갈라 놓는다고 말씀하시는데 갈라 놓는 기준이 아주 엄청난 기준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전해 주는 메시지는 염소의 편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 엄청난 죄들, 강도나 살인이나 전쟁이나 이런 엄청난 죄를 범해서 염소의 편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서 있었는가가 심판의 기준이 되어 있는 점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들 주위에 이런 가난한 사람들이 널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런 이웃들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서 있었는가 하는 문제가 마지막 날 우리를 어느 편에 서 있게 할 것인가를 판별하는 기준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 서 있을 것인가를 지금 이 시간부터 우리 스스로 선택하라는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마태오 복음 25장 1절에서 13절, 열 처녀의 비유를 예로 들자면, 그것은 열 사제의 비유, 열 성직자의 비유라고 말씀드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처녀들이 다 혼인잔치에 초대받았으나 다섯 명의 처녀는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나머지 다섯은 들어가지 못합니다. 저희들 모두도 이렇게 초대를 받았으나 어떤 사람들은 들어가게 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들어가지 못하게 되겠지요. 그 기준은 우리가 과연 그 기름을 준비했는가, 준비하지 못했는가에 달려 있겠지요. 그 기름은 다른 어느 누구도 우리를 대신해서 준비할 수 없는 기름이겠지요. 이 기름을 준비한다는 것, 그것은 바로 이웃들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서 있었는가 하는 행위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또한 루가 복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는 요즘 드라마로 많이 오르내리는 허준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소설 속의 인물과 실제의 인물이 조금은 다른 부분이 있겠지만,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만을 볼 때 저에게 다가왔던 몇 가지 느낌은 자기 자신의 소중한 것을 이웃을 위해 포기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서출의 신분이었기에 양반계급으로의 진출이 막혀 있는 신분입니다. 천민이라는 신분을 벗어 버려야 하는데, 그런 기회가 자기 앞에 왔을 때 동시에 자기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널려져 있는 것을 마주하게 됩니다.

소설 속의 허준은 천민의 신분을 벗어버릴 기회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 당장 내 앞에 있는 나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병자들을 선택할 것인가의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해야 했을 것입니다. 결국 허준은 자기에게 중요한 것을 포기하고 자기의 이웃들을 선택합니다. 또 다른 한 가지 면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되면 어떤 불이익이 오더라도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고 의견을 말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허준이라는 사람을 만나고자 하였고, 도움을 받고자 했으며, 그 사람과 함께 있고자 했었다는 것을 소설이나 드라마 속에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보면 허준이라는 사람이 역할 면으로 보면 예수님과 같은 관점에서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그 시대에 허준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드라마를 보며 감동하여, 몇 차례나 방영이 되고 책으로도 나오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도 지금 허준과 같은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스도인적으로 표현하자면 예수님이라는 분을 강하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왜 이렇게 허준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대다수 사람들에게 회자되는가를 살펴보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기에 그렇다고 봅니다. 바로 허준과 같은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이지요.

한편에서는 다양한 선택의 사회로 건너가면서 사회가 점점 더 비인간화되어 가고 있지만, 이런 현실 속에서도 사람들은 누군가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이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번번히 그 기대가 좌절되었지요. 이런 다양한 선택이 널려 있는 비인간화된 사회 속에서도 우리 이웃들의 깊숙한 마음 속에서는 허준과 같은 사람, 즉 예수님과 같은 사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허준과 같은 사람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처럼 누군가 나에게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나를 보살펴 줄 사람, 나를 도와 줄 사람을 기다리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의 이야기를 보면서 아주 흥미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선생님, 그러면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 질문을 그 율법학자에게 되돌려 주십니다. 즉 “당신은 누구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까?”라며 말이죠.

누가 나의 이웃인가가 주된 관점이 아니라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줄 수 있는가가 주된 관점이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도 허준과 같은 사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참 좋습니다만 진실로 이런 사람과 만나기 위해서는 내가 그런 사람이 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허준과 같은 사람, 착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사람, 예수님과 같은 사람을 참으로 만나기를 원하신다면 누군가 나에게 그러한 사람이 되어 주길 바라는 마음과 함께 내가 그 사람이 되는 길이 우리가 기다리는 그 사람을 만나는 진정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루가 복음 18장 9절에서 14절은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의 기도입니다. 어떻게 보면 많은 성직자 수도자들이 이와 같은 모습으로 되기를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합니다. 제 자신의 모습에서도 발견되고 제가 만나는 이웃들 안에서도 가난한 세리의 모습으로서 하느님 앞에 서 있기보다는 당당하고 경건하고 흠잡힐 데 없는 바리사이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도 자료로 4, 5가지를 드렸으니 이 중에서 마음이 머무는 1, 2개를 택하셔서 기도를 하시고 이 자료를 보시면서 내일 미사 때 있게 될 참회예절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이 시간을 가져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이런 다양한 선택의 사회에서 우리는 과연 어디에 있었는지,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십니다. “아담아, 너 어디있느냐?”라고 말입니다. 그건 우리들 한 사람 한사람에게 물으시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신부님,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과연 우리는 어디에 있었는지 최후의 심판 장면에서 양과 염소의 편 중에 나는 어디에 서 있게 될지, 또 열 사제의 비유에서도 과연 나는 슬기로운 사제인지, 어리석은 사제인지 자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 기도 자료 : 1. 창세기 3장 : 인류의 타락

2. 마태오 25, 31-46 최후의 심판

3. 루가 10, 25-37 착한 사마리아사람

4. 루가 18, 9-14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 5월 6일 >

 

□ 주제 : 회심 (Metanoia :To think differently)

 

시작기도로 루가 복음 19장 1절에서 10절을 읽고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예리고에 이르러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거기에 자캐오라는 돈 많은 세관장이 있었는데 예수가 어떤 분인지 보려고 애썼으나 키가 작아서 군중에 가리워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길을 앞질러 달려가서 길가에 있는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다. 예수께서 그곳을 지나시다가 그를 쳐다보시며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자캐오는 이 말씀을 듣고 얼른 나무에서 내려와 기쁜 마음으로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셨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구나!” 하며 못마땅해 하였다.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 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은 갚아 주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예수께서 자캐오를 보시며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오늘의 주제는 회심으로 정하고자 합니다. 우선 회심에 관해서 살펴보고자 하면 그 안에서 당연히 포함되는 것이 우리 죄의 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죄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예수께서 보여 주신 그 길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곧 사랑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회심이라는 말의 희랍어의 어원을 보면 ‘μετανοια’라는 단어에서 ‘γοέω‘는 생각한다’는 동사입니다. 그래서 ‘메타노이아’라고 하면 ‘생각을 달리한다’는 어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바라보았던 나 자신의 모습이나 세상이나 이웃이나 하느님에 관해서 달리 생각하고, 달리 바라보고, 달리 인식하게 되는 것, 이것이 회심이라고 이 어원상에서도 나타내고 있지요. 예수님과 자캐오의 만남을 읽으면서 사람이 이렇게 변화되어 자유롭게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변화가 어디에서 유래되는가를 다시 한 번 느껴볼 수 있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사랑과 관심밖에 없다는 것을 이 예수님과 자캐오의 만남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이 복음에서 이야기하듯 예리고의 모든 사람들이 자캐오에 대해서 못마땅하게 생각하였고, 배척받는 상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이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예수께서는 바로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배척하고 있는 그 자캐오를 어떻게 바라보셨습니까? 아마 자캐오의 전생애에 걸쳐서 이날의 이 만남만은 결코 잊지 못할 만남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오늘 이 복음에서 읽은 자캐오와의 만남을 보면 모든 사람이 자기를 못마땅해하고 배척하고 있다. 그런데 소문을 들어 알고 있던 예수님이라는 분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길에 나가 군중들 틈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려고 했지만 키가 작아서 군중들 틈에 가려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달려가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고 그곳에서 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수님은 자캐오를 올려다보시면서 자캐오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내려오라고. 아마 이 짧은 만남에서, 내려오라는 그 한 마디 말씀이었지만 자캐오의 마음에는 참 많은 생각이 지나갔을 것입니다. 자기 동네 사람들로부터 받고 있는 대접과는 전혀 다른 대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었을 겁니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관심을 받고 있구나, 누군가 나와 함께 하려고 하는구나, 누군가 나를 사랑하고 이해하고 있구나.’

이것이 자캐오의 전 삶을 달리 바라보게 해준 가장 핵심적인 일이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자캐오가 이렇게 달리 바라보게 되었는가는 자캐오의 삶의 변화를 보면서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자캐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면 돈을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동족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결코 놓을 수 없었던 그 주제가 바로 돈이었던 셈이죠. 돈이 자기를 해방시켜 주리라 생각했지만 역설적으로 돈은 점점 더 자기를 불편하게 하고 배척받게 했습니다. 그런데도 놓지 못했던 그 돈을 예수와의 짧은 만남을 통해서 그 돈으로부터 얼마나 해방이 되는가가 보여집니다. 예수께서 “내가 오늘 너의 집에 머물러야겠다.”라고 하셨을 때 자캐오가 보여 주었던 반응은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 먹은 것이 있다면 그것의 네 갑절을 갚아 주겠습니다.”

여기에서 보면 돈에 대한 인식도 달라져 있을 뿐 아니라 이웃에 대한 인식도 달라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돈도 달리 보이고 이웃도 달리 보이기 시작한 것이지요. 지금까지 자캐오에게 이웃이라면 자기가 돈을 벌어야 할 대상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세금을 물려서 많이 받아 낼 것인가 하는 나에게 돈을 주는 대상으로서만 이웃들이 존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짧은 순간, 내가 누군가로부터 이해받고 사랑받고 있다는 이 체험을 하고 난 다음, 이웃에 대한 인식은 나의 부를 축적시켜 주어야 할 대상에서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그들에게 봉사해야 될 이웃으로 인식을 변화시켜 줍니다. 그리고 돈이라는 것도 나의 불편함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서가 아니고, 이웃에게 봉사하는데 사용될 도구로서 변화됩니다. 함축적으로 예수께서는 죄라는 주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가가 이 짧은 만남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세례자 요한도 온 유다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난 다음에 유다와 갈릴래아 지방을 다니시며 회개하라고 외치셨습니다. 두 분 다 똑같이 회개하라고 외쳤지만 세례자 요한이 외쳤던 회개하고, 예수께서 외치셨던 회개는 그 차원이 다른 회개인 것 같습니다. 그 차이는 실제로 세례자 요한이 회개하라고 외쳤을 때 그의 앞에 다가왔던 사람들과,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왔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다른 공관복음에 비해서 루가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좀더 자세하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루가 복음 3장에 보면 협박하던 사람들, 남을 등쳐먹던 사람들, 속임수를 쓰던 사람들,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기보다는 이기적으로 더 움켜쥐고 있던 사람들, 등의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나왔다고 합니다. 윤리적인 차원에서 윤리적이지 못한 삶을 살아가며 실제로 그들 사회에서 손가락질을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회개하라고 외치셨던 그 회개의 외침은 이런 율법적인 차원에서의 죄인들뿐 아니라 어느 사람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을 향한 외침이었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율법학자들로부터 죄인에 이르기까지 예외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요한 1서에 보면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진리를 저버리는 것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그야말로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어떤 죄인이냐면 바로 이렇게 자캐오처럼 이해받고, 사랑받고,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자 하시는 그런 죄인들이란 사실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죄건, 고해소에서 만나는 우리 신자들의 죄건, 아니면 이 세상에서 발견되는 죄이건, 어떤 죄이건 간에 죄를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받는 죄인이라는 것이죠. 만약 사랑받고 있는 죄인이라는 이 모습을 놓쳐 버리게 된다면 죄는 우리를 참으로 힘들게 하고 좌절하게 하고 절망하게 하는 주제가 될 것입니다.

지금 이곳 의정부 수련원 현관에 보면 루가 복음 15장의 잃었던 아들의 비유에 관한 렘브란트의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우리 현실의 모습을 아주 잘 담고 있는 그림이라고 여깁니다. 사랑받고 있는 죄인의 모습. 우리도 우리 자신이나, 우리 이웃이나, 세상의 죄를 바라볼 때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이 바라보시는 죄에 대한 시각으로써 바라보면 좀더 현실적이고 객관적으로 죄를 바라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죄에 대해서 함께 생각했으면 좋겠다고 적어 놓았던 주제가 “죄라는 것은 너무나 인간적이다.”라는 것입니다.

저희는 교리를 통해서건 신학공부를 통해서건 알고 있듯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은 하느님께로부터 나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악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선의 결핍이라는 신비로운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고 하느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있다면 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다른 모든 것은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공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체험 하나만은 하느님도 우리와 함께 공유하실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죄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참으로 인간적인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제 우리는 이 죄를 어떻게 바라보고, 수용하고, 이해하고 있는가에 따라 우리의 인간적인 성장과 영적인 성장이 좌우될 수 있고 영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인간적인 것이기에 우리가 이 죄라는 주제를 더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점점 더 인간다워질 것이고, 반면에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수용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점점 더 비인간화되어가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둘째로 죄는 그 자체로 참으로 불안한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죄란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결핍인 나약함, 인간의 제한성으로부터 파생되는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라고 느껴집니다. 악이라는 것이 그것의 존재라기보다는 무엇의 결핍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악이라는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존재의 근거를 가질 곳이 없습니다. 악이라는 것은 존재의 근거가 없기 때문에 참으로 불안한 상태의 것이고 죄라는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죄의 상태에 있을 때 우리 자신이 참으로 불안해하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죄는 그 단독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만약 죄라는 것이 단독으로 존재할 수 있다면 인간은 참으로 비극적인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죄는 결코 그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고 그 곁에는 그보다 더 풍성한 은총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20절에 바오로 사도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말씀하시고 계시는 내용은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의 가장 나쁜 영향 중의 하나는 바로 그 죄의 곁에 있는 하느님의 은총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죄가 단독으로 있는 듯이 보여 그 곁에 있는 하느님의 용서나 자비나 은총에 대해서는 가려 버리게 하는 것이 죄의 가장 큰 악영향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작년에 교황님께서 발표하신 회칙 중의 한 구절에 보면 “죄는 우리 양심의 판단을 흐리게 하고, 나아가서 우리의 양심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현상은 바로 그 곁에 있는 하느님의 은총, 자비, 용서를 보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 부산 철강회사 부부 피살사건의 범인이 잡혔습니다. 30대 초반의 젊은 청년이었는데 그는 내 안에 악마가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는 15세에 감옥에 들어가 10년 만에 출소를 하여 몇 년 사이에 9명을 살인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목소리에서는 어떠한 죄책감도 느낄 수 없는 것을 보고 양심이 참으로 무뎌져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죄를 범하면서도 그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고, 자신을 비인간화시키는 것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것인지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듯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죄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죄의 모습은 죄는 우리를 이웃과 나 자신과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단절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단절은 우리를 무서운 고독과 외로움과 절망감에 이르게 합니다.

루가 복음 22장 54-6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장면입니다. 사람들이 “당신도 그분과 한패가 아닙니까?” 하고 질문하자 처음에 베드로 사도의 대답은 “나는 그 사람을 모릅니다.”라며 예수님을 거부해 버립니다. 두 번째로 또 누군가 다가와서 “당신은 그분과 한패요?”라고 하자 베드로가 하는 대답은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라며 자기 자신을 부정해버립니다. 세 번째로 누군가 질문을 하자 “당신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라며 모두를 부인해 버립니다.

바로 죄라는 것이 이런 상황입니다. 하느님도 부정해 버리고 나자신도, 그리고 이웃도 부정해 버립니다. 모두를 부정해 버리고 나면 남은 것은 바로 불안과 고독과 좌절밖에 없어 우리는 단절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렸던것들을 모두 종합해 보면 하느님은 죄인들을 더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상 중에서 우리가 지나쳐 버리는 내용 중의 하나가 예수께서 죄인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루가 복음에서 보면 예수께서 죄인들과 가난한 사람들과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있기를 얼마나 선호하셨는가를 보여 줍니다. 율법학자들, 바리사이파 학자들은 틈틈이 “당신네 선생은 어떻게 저런 사람들과 어울립니까?”라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저런 죄인들과 먹고 마시냐.”는 불평이 여러 차례 나오고 있습니다.

루가 복음 19장의 자캐오의 비유나 15장의 세 가지 비유들은 예수께서 죄인들과 어울려 계실 때 그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비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레위를 부르실 때도, 용서받은 죄많은 여인의 모습에서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예수님의 행동을 못마땅해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경건한 사람들, 의인들을 배척하신 것은 아니었지요. 물론 그들도 다 사랑하셨지만 더 선호하신 것이 있다면 죄인들, 버림받은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배척받은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더 깊이 만나기를 원한다면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스스로 깊이 인식하고 받아들여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 이웃들이 우리에게 어떻게 당신 스승은 저런 사람들과 어울립니까? 라고 물을 때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반응에 거부감이 든다면 우린 아직 예수님의 곁의 자리를 피하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예수께서 죄인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가의 단적인 장면이 바로 예수께서 세례받으신 장면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공생활 첫 시작을 세례 받으러 가신 그 장면에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시던 나자렛 가정은 사랑과 이해와 존중이 있는 성가정이었으나 부모님이 계신 갈릴래아를 뒤로 하고 유다 지방에 오셔서 제일 처음 하신 행동이 세례를 받으러 가신 것이었습니다. 그 세례 장면은 아주 상징적입니다. 루가 복음사가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으러 나왔던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자세하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손가락질을 받던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바로 이들 틈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많았지만 실제로 그들은 그 사회에서 지탄을 받은 불결한 사람들, 더러운 사람들, 그들 사회에서 인간 취급을 못 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갈릴래아를 떠나서 당신의 공생활 첫 시작을 이런 장소를 택하셨는지 그 의미를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그 모습은 참으로 우리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성화를 보면 예수님 태어나신 곳에 둥그렇게 성광도 그려 넣고 있지만 현실은 우리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어쩌면 더 가난하고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렇게 육화를 하셨는데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그 죄인들 틈으로 들어가시면서 더 구체적으로 육화를 하십니다. 그 죄인들 틈으로 들어가시면서 “나는 당신들과 다른 사람입니다.”라며 고개를 치켜세우고 들어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아무도 그 죄인들과 예수님을 구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려면 그 죄인들 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과연 우리 교회는 누구와 한 가운데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또한 우리 교회의 모습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루가 복음 15장에 잃었던 아들에 관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 작은 아들이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쉽게 외면적으로 드러나는 행동 하나만으로 모든 걸 판단합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들은 동기와 이유를 가지고 행동합니다. 설령 그 이유가 나에게 알려져 있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무의식적인 차원에서 그 동기는 항상 있습니다.

얼마전 남자수도회 수련장들 모임에 참석했는데 어느 수도회 수련장 신부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수도회는 회헌상 담배를 못 피우게 되어 있답니다. 그래서 당연히 담배를 안 피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날 숨어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한 수련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수련자를 불러 회헌상 담배를 못 피우게 되어 있는데 만약 끊지 못했다면 끊도록 하라는 주의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몇 개월 후에 또 담배를 피우고 있던 그 수련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수련장께서 수련자를 나무라자 신부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신데 우리를 좀더 감싸 주고 이해해 주셔야지 나무라시면 어쩌냐며 오히려 반문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쭉 이야기를 듣다가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드러난 행위도 중요하지만 그 사람이 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알아보셨느냐고 물어 보았습니까?” 그랬더니 그 수련장께서 ‘아, 그것인 모양’이라는 얘길하셨습니다. 그 친구가 수도원에 스스로 원해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로 들어오게 된 것이랍니다. 결국 담배를 피운 것은 스스로 퇴회하지 못하니까, 신부님들이 자신을 내보내 달라는 의미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아도 드러나는 행위보다는 그 이면의 동기가 있음을 보아야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잃었던 아들도 아마 떠날 수밖에 없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또 그 아버지도 작은아들의 결정을 존중하고 계시는데 거기에도 존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을 테죠. 아픈 체험, 죄의 체험을 통해서도 성장하기를 바라셨든지 하여튼 아버지도 아들의 결정을 존중하였던 것입니다. 작은아들은 객지에서 재산을 다 탕진해 버리고 먹을 것도 없어 짐승이 먹는 것으로라도 주린 배를 채워 보려 하였으나 그것조차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죄의 상황에서 비인간화 되어가는 상황이지요.

그런데 바로 그곳, 삶의 질곡 한 가운데, 바닥까지 내려간 비참한 상황에서 다시 올라섭니다. 그건 아버지 집을 떠올리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모습은 작은아들이 아버지 집으로 되돌아가고자 했던 첫 동기가 그렇게 순수한 것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아서라기보다는 배가 고팠기 때문이라고 성서는 들려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발걸음이 그렇게 고상한 동기가 아닐지라도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그 어떤 동기일지라도 사용하실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이 이 비유에서 들려 주는 메시지라 생각됩니다. 순수하지 않든, 고상하지 않든, 어떤 동기를 사용해서라도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로 오게 하시고 남아 있는 중요한 요소가 있다면 이제 이 동기를 어떻게 정화시켜 나가는가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실제로 작은아들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그 과정을 통해서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는 사실, 그래서 자기가 아들로써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정화되어 갑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왔을 때의 아버지의 모습도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아들은 지난 세월 동안의 이야기를 세세히 얘길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들려 주는 이야기에서 잘잘못을 가려내고 훈계하기보다는 한 마디 말씀 없이 아들에게 어떻게 하면 좀더 근사한 잔치를 베풀어줄 수 있을까 하며 잔치준비에 여념이 없습니다.

루가 복음 15장의 이 모습이 바로 고해소에서 이루어지는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즉 고해소 안은 잔치가 벌어지는 장소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37장과 42장, 45장에서 50장 15절에서 21절까지는 요셉과 그 형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성서에 보면 요셉도 훌륭한 사람입니다만 똑같이 그 형들도 훌륭한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회심이라는 우리의 삶에 대해서 재해석이 이루어지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요셉과 요셉의 형들에게도 아픈 체험을 통해 그들의 삶에 대해 재해석이 이루어집니다. 형들은 형들대로 동생을 팔아버렸다는 아픈 체험을 간직하고 있었고, 동생은 동생대로 가까운 형들로부터 배척받았다는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세히 바라보면 형들도 그 아픈 체험을 통해 크게 성장을 했고, 요셉도 그 체험을 통해 많은 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20년 후에 에집트에서 형들을 처음 만나게 되었을 때 형들의 처음의 반응은 옛날 요셉을 팔아넘긴 일에 대해 20여 년 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는 걸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아픈 체험은 얼마나 그 형들을 성장시켜 주었는지, 예전에는 잘난 체하며 사랑을 독차지하던 동생이 싫어 요셉을 팔아넘겼는데, 집에는 아버지가 요셉보다 더 애지중지하는 벤야민이라는 동생이 있습니다. 이제 그 벤야민이 잡혀 있어야 할 상황이 되니까 형인 유다가 나서서 그 아이를 풀어 주고 자신이 대신 잡혀 있겠다고 합니다.

성장이란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형들은 아픈 체험을 통해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들로 성장을 했고, 요셉도 자기자신의 삶을 재해석하기에 이릅니다. 어쩌면 형들의 이런 변화된 모습을 보고서 요셉도 그렇게 촉발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요셉도 지금까지 자신의 아픈 체험을 응어리로 간직했을 텐데 형들의 변화된 모습을 보며 오히려 형들을 위로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사실만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형들이 자신을 팔아 넘긴 사실은 변하지 않지만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위해서 자신을 먼저 에집트 땅으로 보내셨다는 새로운 의미로 재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요셉과 형들의 이야기도 회심의 문맥에서 바라볼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 기도 자료로 하나 더 포함시키고 싶은 것은 참회 예식서입니다. 예식서를 따라 하셔도 좋고 아니면 신부님들의 삶에서 나는 과연 나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조화로운 관계를 맺고 살았는가를 자문해 보시고, 또 이웃과는 얼마나 조화로운 관계로 살았는가? 하느님과는, 또 내가 하고 있는 일과는 어떤 관계를 맺어 왔는가를, 이 기도 자료를 다 하실 필요없이 한두 가지 정도를 선택하셔서 하시기 바랍니다.

 

*** 기도 자료 : 1. 루가 15, 11-32 잃었던 아들

2. 루가 19, 1-10 자캐오

3. 창세기 37장

42-45장

50, 15-21

 

 

 

< 5월 7일 >

 

□ 주제 : 價値觀의 顚倒

 

루가 복음 4장 1절에서 11절의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예수님을 읽고 이 모임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요르단강에서 성령을 가득히 받고 돌아오신 뒤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셔서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 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서 사십 일이 지났을 때에는 몹시 허기지셨다. 그때에 악마가 예수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하여 보시오.” 하고 꾀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를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잠깐 사이에 세상의 모든 왕국을 보여 주며 다시 말하였다. “저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저것은 내가 받은 것이니 누구에게나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수 있소. 만일 당신이 내 앞에 엎드려 절만 하면 모두가 당신의 것이 될 것이오.” 예수께서는 악마에게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예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다시 악마는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 내려보시오. 성서에 ‘하느님이 당신의 천사들을 시켜 너를 지켜 주시리라.’ 하였고 또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손으로 너를 받들게 하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소?”하고 말하였다.

 

오늘 저희들이 기도하게 될 이 주제는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보았던 죄나 회심이나 행실이나 다 중요한 주제이지만, 오늘의 예수님의 가치관에 대한 주제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주제들보다 더 실천적이고 우리의 삶 깊숙이 와 있는 주제라고 할 수 있지요. 광야의 유혹 장면은 예수께서 공생활에 들어가시기 직전의 모습입니다. 나자렛을 떠나 제일 처음으로 가셨던 곳이 요르단 강의 죄인들이 모여 있던 죄인들 틈이었습니다. 죄인들 틈으로 들어가시면서 그들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죄인들의 틈에 끼여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광야로 들어가셔서 시간을 가지시고 이 광야의 유혹 다음에 곧바로 전도를 시작하십니다.

이 광야의 유혹에서 비쳐지는 예수님의 모습은 예수님의 사목지침이라고 이해해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예수께서 앞으로 3년간의 공생활 동안에 어떤 원칙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 어떤 지침으로 살아가며 어떻게 세상과 이웃과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살아갈 것인가 하는 원칙이 이 광야의 유혹 장면에 들어 있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갈릴래아를 떠나올 때 이미 어떤 선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요르단 강가에서 거듭 그 선택을 확인하셨고, 확인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에 들어가셔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십니다. 저희들의 삶도 이것과 비슷하다고 여겨집니다. 우리들도 오래 전에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학교에 들어가 양성을 받고 서품을 받아 사제로써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미 어떤 선택을 했고 이 삶의 여정에 들어와 있는데 마치 예수께서 선택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탄의 유혹에 노출되어 있었듯이 우리도 비록 선택을 했다고는 하지만 이런 악의 유혹에 계속 노출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 광야의 유혹 장면에서 비쳐지는 세상의 구도는 선과 악이라는 두 세력의 긴장관계에 있는 것으로 비쳐집니다. 악은 끊임없이 자기의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해서 누구에게나, 심지어 예수님에게조차 자기 수하에 들어오도록 유혹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맞서서 예수님은 선으로 그 영역을 확보하시고 그 영역을 넓혀 가고자 하십니다. 이것은 지금의 현실이기도 하고 아마도 세상 끝날까지 이런 현실로써 이 세상이 움직여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탄이 예수님에게 유혹해 오는 이 내용들을 보면,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 사회에서의 가치관과 비교해 볼 때, 사탄이 유혹하는 이 목소리가 경계하고 방어해야 할 덕목으로 주어진 것인가, 아니면 우리 사회에서는 지상의 목표로써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는 사탄이 유혹하는 이 내용이 가장 가치 있고 모든 사람이 추구해야 할 가치로운 덕목이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탄이 제시하는 것들을 좋아하고 심지어 우리들마저 그렇습니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이것이 그렇게 나쁘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아주 좋고, 바람직하고 가치 있는 것처럼 다가오기 때문에,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고 이 세상도 이것을 추구하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깨어서 이것을 미리 알아 경계해야하는데도 그러지 못하고, 우리를 내맡겨 버리는 실정이 우리의 모습인 듯 합니다.

반면에 예수께서 보여 주시던 사탄의 유혹 앞에서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예수님 삶의 자세를 본받아야 할 덕목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아니면 오히려 피해 버려야 할 덕목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참으로 혼돈스럽습니다. 피해야 할 사탄의 유혹은 좋은 것처럼 느껴지고 예수님의 삶의 자세나 태도는 본받아야 하는데도 우리에게 어려워서 피하고 싶은 대상으로 다가와 있습니다. 우리 사회 전반이 이런 혼돈 속에서 표면적으로 선하게 비쳐진 것을 참 선인 것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만약 악의 유혹이 그림에 그려져 있듯이 머리에 뿔이 달리고, 꼬리가 달리고, 창을 들고, 새까만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다 무서워서 피해 버리겠지만, 사탄의 유혹은 그렇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광야의 유혹에서처럼 아주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의 계교를 미리 알아서 경계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참다운 생활을 깊이 인식하고 본받을 수 있는 은총도 함께 청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초대하시는 삶들, 원수도 사랑하라든지 산상수훈의 내용으로 살아가라는 초대는, 우리는 썩 기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부감이 들고 피해 버리고 싶은 내용들로 산상수훈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초대는 자연스럽게 행할 수 있을 만큼 쉽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노력하거나 훈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연어라는 동화에 우리의 현실들에 대해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살을 거슬러올라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가를 말입니다. 그렇듯이 그런 그럴듯한 악의 유혹을 물리치고 예수님이 살아가신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요.

살아 있는 물고기와 죽은 물고기로 비유하자면 죽은 물고기는 물결을 따라 흘러갈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죽은 물고기는 결코 물결을 거슬러올라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의 초대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물결을 거슬러올라가는 살아 있는 물고기가 되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는 참으로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도 힘들이지 않고 물결따라 흘러가기만 한다면 쉽기는 하겠지만 그런 삶은 결국 예수님의 삶이 아니라 이 세상의 세력들의 삶이라고 느껴집니다.

제가 1981년에 수도원에 입회하여 2년 동안 수련을 받았는데 수련기간 중에 한 달 정도씩 다른 곳에 나가 실습하는 때가 있고, 또 매 주말에도 실습을 나갑니다. 그 수련기간 중에 일 주일에 한 번씩 나가 봉사활동을 한 곳이 지금은 없어진 영등포 시립병원이었습니다. 그곳에 행려병자들을 보호하는 병동이었는데 그 병동에 들어서면 악취가 심했습니다. 그런 병동에 가서 행려병자들과 말동무도 해드리고, 머리도 깎아 드리고, 대소변도 치워 드리고, 청소도 하면서 두세 시간 봉사하다가 수도원으로 가는 버스를 타면 사람들이 모두 우리들을 피해 버렸습니다. 두세 시간 중에 그 악취가 몸에 배어 버린 것입니다. 더더욱 겨울이 되면 동상환자들이 참 많았는데, 뼈와 살이 썩어들어가는 그 악취는 참으로 참기 힘들었습니다. 수련기간 2년 동안 매주 그곳에 가야 했는데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주말이 되기만 하면 병원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팠습니다. 그 2년 내내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어떻게 피해갈 수 없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수련장 신부님의 명을 거역할 수가 없었지요.

지금 그때를 되돌아보면서 많은 생각을 합니다. 그때는 그것을 피해 버려야 할 것이라고 느꼈는데, 어쩌면 예수께서는 제일 함께 하고 싶었던 이웃들, 제일 계시고 싶었던 곳이 있었다면 바로 영등포 시립병원 같은 곳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 그곳이었다면 바로 그곳이 천국이었을 텐데 그러나 제게는 그곳은 천국이 아니었습니다.

저에게도 이런 작업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께서 계시는 그곳에 강한 거부감이 들더라도 내가 그곳으로 갈 수 있겠느냐? 저한테 그 거부감이 들지 말라고 요구한다면 그건 너무 무리한 요구이겠지요. 그건 제 자신의 삶의 역사에서 거부감이 들게 형성되어 있는 현실이니까요. 그러나 그 거부감이 드는 것까지는 배척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예수님이 계신 그곳에 가기 싫은 마음이 있는데도 어떻게 이런 자연스런 물결들을 거슬러서올라갈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저 자신에게 남아 있는 숙제이고 예수님의 초대라고 생각합니다.

이 주제는 선과 악이 아주 교묘하게 뒤섞여 가지고, 악이라는 것이 오히려 선처럼 다가와서 지상의 가치처럼 추구하고 있는 사회현실과 예수님의 초대를 거부감이 든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배척해 버리고 오히려 피해 버리는 우리의 현실을 보여 줍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좌지우지하게 하는 힘들이 있다면 바로 이 두 가지 가치관이 혼재되어서 혼탁해지고 왜곡된 결과라고 봅니다.

이제 가치관의 전도가 일어나야 될 상황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건 예수님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계속 세상 끝날까지 악의 세력과 선의 세력과의 사이에서 교묘하게 선처럼 드러나는 악의 세력들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고 성직자들, 사제들이 이 가치관의 전도를 우리 스스로 살아가고 실천해 나가도록 초대받은 것이 우리의 신원입니다.

루가 복음 4장 1절에서 11절은 예수님의 사목지침, 예수님이 공생활의 기본원칙을 담고 있는 데 우리의 가치관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이런 관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의 세력이 엄청나듯이 사실 악의 세력도 엄청나고 교묘하다는 것을 직시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마태 복음 5장과 7장은 예수님의 가치체계를 담고 있습니다. 개신교 성서학자 중에 요아킴 예레미아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산상수훈에 대해 쓴 짤막한 책에서 산상수훈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들을 하면서 세상종말이 얼마남지 않은 시각으로 보고 과도기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이 따라야 할 초대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다른 하나는 우리 모두에게 일반적인 상황에서 살아가야 될 명령이며 법이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이 신학자는 이 두 시각에 동의하지 않고 이것은 복음, 즉 기쁜소식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사실 산상수훈의 많은 부분은 우리에게 거부감이 들게 하지만 이 산상수훈이 나에게는 어떻게 다가오고 있는지 피하고 싶은 초대는 아닌지 힘들지만 거슬러 올라가야 할 복음으로 인식되는지 죽은 물고기와 산 물고기와의 이미지를 함께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이 주제가 우리들 개인의 사제로서의 삶에도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고, 동시에 사제로서 사목에 임하는데도 중요한 지침과 원칙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불을 놓고 분열을 놓기 위해 오셨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혼탁하고 왜곡된 가치 체계 속에 놓여야 할 것이고 그 안에서 그런 혼탁과 결별하고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겠지요.

 

*** 기도 자료 : 1. 루가 4, 1-11 광야의 유혹

2. 마태오 5-7장 산상설교

 

<5월 8일>

 

□ 주제 Ⅰ : 치유

 

요한 복음 5장 1절부터 9절에서 베짜타 못가의 병자를 치유하시는 성서구절을 읽겠습니다.

 

얼마 뒤에 유다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예루살렘 양의 문 곁에는 히브리말로 베짜타라는 못이 있었고 그 둘레에는 행각 다섯이 서 있었다. 이 행각에는 소경과 절름발이와 중풍병자 등 수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는데(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그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 물이 움직일 때에 맨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라도 다 나았던 것이다.) 그들 중에는 삼십팔 년이나 앓고 있는 병자도 있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이 거기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아주 오래된 병자라는 것을 아시고는 그에게 “낫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병자는 “선생님, 그렇지만 저에겐 물이 움직여도 물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 혼자 가는 동안에 딴 사람이 먼저 못에 들어갑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일어나 요를 걷어 들고 걸어가거라.” 하시자 그 사람은 어느새 병이 나아서 요를 걷어 들고 걸어갔다.

 

오늘 기도 안내 주제는 치유에 대해서입니다. 그전에 제가 1994년 9월부터 1995년 3월까지 마닐라에서 제3수련을 받고 한국에 오면서 동남아를 돌아서 오게 되었습니다. 저의 첫번째 목적은 동남아에 퍼져 있는 예수회원들을 만나고 싶었고 그분들이 어떻게 사시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특히 관심이 있었던 것은 각 나라의 수련원을 방문하고 싶었습니다. 처음 마닐라를 출발하면서 마닐라 수련원을 방문하였고, 그 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태국, 홍콩, 타이완의 순서로 수련원을 방문하였습니다. 그 수련원들을 방문하며 수련장님들께 수련원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질문하였습니다.

필리핀의 수련장이시던 75세 정도의 할아버지 신부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련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버릇을 들이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전의 사회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이웃을 바라보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데 익숙해 있던 삶의 방식을 어떻게 수도생활에 더 적합한 복음의 방법으로 버릇을 바꾸어 주는가 하는 것이 수련원에서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예전에도 건전하고 성실하게 살았겠지만 수도생활 안에서의 삶과 예전의 삶과는 조금 다른 삶의 버릇들이 새로 들어야 한다는 말씀이셨어요.

왜냐하면 예전에 살아가던 토양과 지금 살아가고자 하는 토양이 다르기 때문이죠. 어쩌면 우리 신학교의 교육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여기에서 버릇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의 변화는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겠지요. 신부님들께서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버릇 아닌 것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를. 거의 버릇이 대부분입니다. 심지어 잠을 잘 때조차 그 버릇으로 잠을 잡니다. 우리의 삶에서 놀랍게도 이상과 포부보다는 우리 일선의 삶, 우리 행동과 만나고 가장 가깝게 있는 것은 바로 버릇인 듯 합니다. 그래서 버릇이 우리에게 얼마나 긍정적으로 습득이 되어 있는가, 아니면 그 버릇이 악습인가, 그것은 우리가 마음은 앞서 있어서 복음의 초대를 따르고 싶고, 또 수도회 장상의 초대, 교구장의 초대, 지구장님의 초대가 아무리 좋다고 한들 내가 직접적으로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좋다는 그 느낌이나 수용이 아니라 바로 버릇으로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나의 삶의 패턴에서 일어나는 버릇을 알아야겠고 그 버릇이 창조적인지, 복음에 부합되는 것인지 알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버릇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것은 새로운 버릇을 들이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새로운 버릇은 거듭거듭 끊임없는 연습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버릇하나 바꾸는 것은 굉장히 힘듭니다.

신학교의 양성기간 6, 7년동안, 수도회에서 사제가 되기까지의 10여 년 동안 신학적이고 철학적이고 영성적이고 사목적인 지식을 많은 준비를 통해 최선을 다해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전달을 받은 양성과정 중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화해서 새로운 버릇으로 만들어 가느냐입니다. 새로운 버릇으로 만들어 가지 못한다면 이상은 잔뜩 키워 놓았는데 실제 살아가는 상황에서의 도구는 키워 놓지 않아 더 쉽게 좌절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치유 장면에서 보여 주는 베짜타 못가의 병자나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이나 이런 아픔들도 우리의 버릇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선 베짜타 못가의 병자를 보면 38년 동안이나 앓아 온 참담한 현실입니다. 못에 물이 움직일 때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치유가 되는 것을 알고는 있는데 자기 현실을 보면 물이 움직여도 스스로는 들어갈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러면 주위에서 누군가 도와주어야 할 텐데 도와주는 사람도 없는 참으로 절망적인 실정입니다. 그러나 그 환자는 자신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 못에 들어갈 가능성이 전혀 없는 듯이 보이는데도 그 못을 떠나지 못합니다. 그것은 아마 삶의 관성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못 주위에 많은 환자들이 있었지만 바로 이런 환자에게 특별히 더 마음이 끌리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환자에게 다가가셔서 “당신은 낫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물음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기에도 많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 환자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었을 때도 그 환자는 거기에 대해서는 대답을 하지 않고 자신의 상황만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신세한탄 같은 것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의 말을 제지하지 않으십니다. 그 환자가 장황하게 말하며 충분하게 불평과 아픔을 토로할 수 있도록 듣고 계십니다. 그러고는 또 전혀 다른 대답을 하십니다. 병이 낳았다는 대답이 아니라 “자, 일어나서 요를 걷어들고 가라.”고 초대하십니다. 환자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지요. 지금까지 움직이는 물에 들어가야 된다는 일념으로 그 못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예수라는 분이 자기의 신세한탄을 모두 듣고는 일어나서 요를 들고 가라고 하시니까요. 베짜타 못가의 이 병자가 기대했던 기대는 물에 들어가야 한다는 버릇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한 이 환자에게 치유는 없었을 겁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이 환자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않았습니다. 그 환자는 실제로 물에 들어가지 않고도 낫게 되었으니까요. 이 환자의 입장에서는 자기 자신의 기대치가 충족되는 것이 곧 치유요 변화라고 믿는 마음으로 그 못가에 계속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환자에게 보여 주시는 것은 당신의 기대치가 충족되는 것이 당신을 치유시키지도, 변화시키지도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당신의 변화와 치유는 이미 나의 말을 받아들일 때 있게 될 거라는 마음이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 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에서도 우리의 버릇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제가 1994년 마닐라에 있을 때 성탄을 맞아 북부 산악지역의 오지로 보름 정도의 사도직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아주 깊은 산골짜기였고 오지 중에서도 깊은 오지였어요. 그곳에 공소가 있었는데 한 할머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일흔여섯쯤 되셨는데 그 할머니의 삶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평생동안 7번의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그 산골마을의 전통적인 관습은 남자이건 여자이건 혼인을 하여 아이가 없으면 언제든지 헤어져서 서로 다른 배우자를 만나서 살아야 하는 관습이었답니다. 그래서 그 할머니는 결국 7번씩의 결혼을 하였으나 결국 아이를 한 번도 낳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그 할머니를 보면서 사마리아 여인이 떠올랐습니다. 필리핀 북쪽은 산악지역이라 작은 땅이라도 논으로 만들어 농작물을 심어야 했기에 가파른 계단식 논들을 지어 놓았습니다. 할머니는 평생을 그곳에서 사시면서 평생을 그 비탈진 산에서 발가락에 힘을 주어 버티면서 논을 갈아야 했기에 발가락 다섯 개가 제대로 뻗어 있는 것이 없이 모두 다 뒤틀려 있었습니다. 손도 마찬가지였지요. 할머니의 모습은 존재자체로 살아오신 삶의 애환이 그대로 몸 전체에 녹아 든 모습이었습니다. 결혼을 7번이나 하셨다는 얘길 들어도 교회법으로 죄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그 할머니의 삶이 애환으로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어쩌면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보셨을 때도 이런 느낌을 받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한낮에 우물가에 물을 길으러 왔다고 합니다. 아시겠지만 이스라엘은 한낮이면 무척 무덥기 때문에 한낮에는 물고기도 잡지 않고 사람들이 잘 활동을 하지 않습니다. 아침 새벽이나 해가 떨어지고 나서 움직이지요. 그런데 성서에는 이 여인은 한낮에 물을 길러 나왔다고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는 이야기일 겁니다. 그러나 목은 말라 갈증이 나고 물은 마셔야겠고, 정신적인 의미에서 보면 허전함이나 공허함이나 이런 것의 갈증이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 무엇으로든 채우고 싶어서 한낮의 무더위 속에서도 우물가로 나왔던 것이겠지요.

몇 년 전 필리핀에서 공부할 때에 어느 수녀원에서 피정지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어느 수녀님은 이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을 수녀님 나름대로 제목을 붙이셨는데 ‘정오의 우물가’라는 이름을 붙였더군요. 그 수녀님 말씀이 자기 자신도 외롭고 허전하고 공허하고 사람들을 피하고 싶을 때면 즐겨 찾던 곳이 있었다고 합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곳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그런 곳이 이 우물가였는가 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불안감이나 공허감을 이성과의 만남으로 해소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한 남자를 만나서 같이 살아보아도 공허함과 허전함이 없어지지 않자 또 다른 남자를 만나 보며 그렇게 다섯 번이나 결혼을 하게 되었겠지요. 이렇게 버릇이라는 것은 창조적이고 긍정적인 결과를 내지 못했는데도 우리의 삶의 패턴은 계속 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듭니다. 이 여인에게는 그것이 이성이었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될 수도 있겠고, 아니면 명예나 재물이나 그 주제는 다양한 것이 될 수가 있을 겁니다. 그래서 그 내용은 각자에게 조금씩 다르겠지만 그런 패턴은 비슷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 패턴이라는 것을 다른 말로 버릇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마리아 여인이 한낮에 한적한 우물가로 물을 길으러 왔을 때 바로 예수께서 그곳에서 먼저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사목현장에서 만나는 신자들도 신앙심이 깊어 성당의 성사활동이나 봉사활동에 열심인 사람들도 많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표면적으로 몸만 왔다갔다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삶의 패턴을 계속 되풀이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도 우리 삶의 패턴을 더 창조적이고 긍적적이고 복음적인 버릇으로 변화시켜 나가야겠지만 사목현장에서 만나는 신자들이 이런 복음적이고 창조적인 삶의 패턴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사목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첫번째 주제는 치유입니다.

치유 장면의 자료는 마르코 복음 1장의 나병환자의 이야기와 요한 복음 11장 38절에서 44절의 나자로를 살리시는 예수님입니다. 요한 복음 10장 마지막 절을 보시면 유다인들은 돌로 예수님을 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을 피해서 요르단강 건너편으로 가 계셨지요. 그런데 요르단강 건너편에 가 계실 때 예루살렘 근처에 살던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고 예수님께 전갈을 보냅니다. 그 소식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유다로 가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곳으로 가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은 “며칠 전만 하더라도 그 유다인들이 선생님을 돌로 치려고 했는데 그곳으로 다시 가려고 하십니까?”라며 못마땅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토마스가 나서서 “자, 우리도 이분과 함께 가서 생사를 함께 합시다.”라며 그들을 격려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다로 다시 돌아가시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여행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자매들은 예수님을 초대했는데도 나자로의 무덤으로 예수님을 모셔 가기를 꺼려하고 있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기 때문에 악취가 많이 난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곳에 가시고자 하십니다. 이것은 나자로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해당되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부족한 곳, 수치스럽고 냄새나는 곳으로 다른 사람을 초대하는 것을 꺼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로 그곳으로 가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 치유 장면에서도 선택하셔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수난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자료를 드리지 않겠으니 공관복음 중에서 어느 복음이건 마음에 여운이 많이 남고, 머물고 싶은 곳이 있다든지, 아니면 오히려 제일 거부감이 드는 장면을 정하시어 기도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수난 복음을 보시면서 이사야서 고난받는 야훼의 종의 노래도 찾으셔서 영적 독서를 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전반적인 모습을 전해 드린다면 예수님이 공생활 중에는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신다든지, 치유를 하신다든지, 기적을 행하신다든지, 가난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들과 함께하시면서 아주 능동적인 삶을 살고 계십니다. 그러나 수난에 들어가게 되면 갑자기 그 늠름한 모습이나 능동적인 면이 다 사라지고 말도 없어지며 아주 수동적으로 변합니다.

공생활 중에도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씀이나 행적으로 함께하심으로써 우리에게 하느님을 나누어 주시고 능동적으로 다가오셨지만 수난부분에는 공생활에 못지않게 더 깊이 하느님 나라를 전해 주시는 데 더 투신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떤 의미에서인가 하면 공생활 중에는 당신의 권능들, 달란트들이 더 활발히 전해졌다면 수난부분에서는 그런 것들이 아니라 그야말로 당신 존재 자체만으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고 계십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말살되고 짓밟히고 한 마디 말도 하지 못하시며 당신의 존재 자체로만 고통을 당하십니다.

우리의 경우를 보아도 기쁨 중에 있을 때보다는 고통과 슬픔 중에 있을 때 우리 존재가 더 깊이 스며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나 유대 지도자들은 아주 이상하게 생각하며 묻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저렇게 고발하고 있는데 당신은 아무 할 말이 없느냐? 라는 물음에도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묵묵히 그 안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공생활 중에도 힘차게 활동하셨지만 이 수동적인 침묵 중에서도 얼마나 힘차게 하느님 사업에 당신을 내어 놓으시는지 함께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 기도자료 1. 요한 5, 1-9 베짜다 못가의 병자

2. 요한 4, 1-30 사마리아 여인

3. 마르코 1, 40-45 나병환자

4. 요한 11, 38-44 라자로를 살리심

 

 

□ 주제Ⅱ : 수난

 

시작 기도로 요한 복음 21장 예수님께서 티베리아 호숫가에 나타나셔서 제자들과 아침을 나누시고 베드로 사도와 함께 대화를 나누시는 장면입니다.

 

모두들 조반을 끝내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예수께서 두 번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예수께서 세 번째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바람에 마음이 슬퍼졌다. 그러나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분부하셨다. 이어서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네가 젊었을 때에는 제 손으로 띠를 띠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를 먹으면 그때는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의 이 말씀은 베드로가 장차 어떻게 죽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인가를 암시하신 말씀이었다. 이 말씀을 하신 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늘은 어제의 수난복음을 조금 보충하고 부활과 우리의 일상 삶 안에서의 영성생활에 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 수난에 보면 영어 표현에 Passion이라고 합니다. 아마 라틴어도 passio라고 비슷하게 표현될 것입니다. 패션이라고 하면 영어 의미에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아주 엄청난 사랑이라는 의미와 아주 엄청난 고통이라는 의미가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사화를 보면 어디까지가 사랑이고 어디까지가 고통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두 가지가 깊게 얽혀 있는 것을 느낍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에 들어가시기 전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말씀이나 행적이나 치유나 함께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지만 이 수난에서는 공생활 때의 그런 권위 있는 모습의 사랑표현은 아니지만 어쩌면 더 깊은 사랑이 그 안에 담겨 있다고 봅니다.

제가 로마에서 신학공부를 끝내고 지첸시아 공부를 할 때 교수인 수녀님 한 분께서 논문을 쓰셨는데 논문을 쓸 때는 통계자료를 얻기 위해, 어떤 假定을 하나 정해 가지고 출발을 하게 됩니다. 어떤 가정으로 출발을 하셨는가 하면 우리의 심리적인 차원에서 그 사람이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복음의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도 성숙할 것이다. 그리고 심리적인 차원에서 그 성숙의 도가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복음의 가치를 보는 인식의 수준도 떨어질 것이라는 가정이었습니다. 즉 성숙한 사람일수록 왜곡됨이 없이 복음의 가치를 인식할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것에 대한 입증될 만한 통계자료를 얻기 위해 로마에 켄셉세이션 센터에 오신 많은 성직자, 수도자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하며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분들이 태어나서 기억할 수 있는 한도 내의 가장 어린시절로 되돌아가 기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분들의 부모님의 배경이나 개인의 배경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기억할 수 있는 한 어린시절로 되돌아가서 지금 이 시간까지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다 듣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분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이 이야기 속에서 보게 됩니다. 자기 자신들과의 삶에서는 성숙하게 살아왔는지,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얼마나 성숙했는지, 하느님과는 어떤 관계로 살아오셨는지, 또 하는 일에 있어서도 어떻게 성숙하게 살아오셨는지, 이런 차원에서 살피게 됩니다. 그분들의 생각이 옳은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살아온 역사를 살펴본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선포하는 가치가 있겠지만, 또한 실제로 살아가는 삶이 있습니다. 내가 옳다고 하지만 그것을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선포하는 가치로만 남아 있습니다. 삶의 가치로는 아직 통합이 안 되어 있는 상황이죠. 그래서 인터뷰를 하며 그 사람들의 심리적인 삶과 영적인 삶에서 얼마나 성숙하게 살아오셨는가를 나름대로 평가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몇 가지 인터뷰 자료를 가지고 몇 가지 테스트를 같이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인터뷰 자료입니다.

그분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오셨는가가 전 삶을 다 하기에 아주 방대한 자료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나오는 자료가 한 50페이지 정도의 분량을 리포트로 제출합니다. 그런 자료들을 다 종합해 이분이 어느 정도 성숙한 과정에 와 있느냐를 평가하는 과정들이 또 있습니다. 이 자료와 함께 한 작업으로 동일한 사람에게 무기명으로 “당신이 지금까지 수도자와 성직자로서 살아오는데 복음에 관하여 설명해 주길” 초대하는 질문을 합니다.

“만약 당신 친구에게서 어느 낯선 사람이 가톨릭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고 복음이 제시한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려 달라고 찾아왔는데 당신이 성직자로서 복음에 대한 예수님을 더 잘 전해줄 수 있겠기에 소개하니 당신은 그 친구에게 어떻게 복음의 예수님을 들려주겠습니까?” 라는 질문을 드립니다.

그러니 자료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신의 일생의 삶에 대한 인터뷰와, 또 다른 자료는 본인이 복음에서 예수님을 인식했을 때의 자료입니다. 일생에서 드러나는 자료에서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복음에 비쳐지는 예수님도 왜곡됨이 없이 볼 것이고, 성숙도가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복음의 예수님을 왜곡되게 인식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수녀님이 자료를 모두 받아 조사하다 보니 난관에 부딪쳤습니다. 처음의 가정이 맞지가 않았던 거죠.

만약 그 가정이 맞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될 상황이었던 거지요. 그래서 깊이 생각에 잠겼다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쳐갔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복음에서 전해 준 예수님의 모습을 다시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에 드러난 예수님을 세세하게 살피면서 조금씩의 차이가 드러남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차이인가 하면 1차 피정의 주제로써 제자직에 두 가지 차이가 있다는 타이틀을 걸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됨으로써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체험이 두 종류의 체험이 있습니다.

한 종류는 위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와 격려의 의미들입니다. 우리에게 선물로써 다가오는 위로와 행복감을 주는 요소들입니다.

다른 한 가지 요소는 예수님의 제자가 됨으로써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치르지 않으면 안될 체험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세분해 보니 이제 심리적인 모습의 성숙과, 미성숙이 드러나는 것을 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일생의 삶에서 성숙한 삶을 살면 살수록 이 두 가지 체험이 공존합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위로뿐 아니라 십자가의 체험마저도 함께 보고 있습니다. 일생의 자료에서 성숙도가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한 가지 모습밖에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즉 십자가보다는 위로의 모습으로만 드러나게 됩니다.

이런 위로의 체험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됨으로써 누릴 수 있는 선물인데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가 됨으로써 살아가야 할 다른 초대가 있습니다. 즉 나를 행복하게 하는 사랑과 주님의 위로를 내 편에서도 나의 이웃 안에서 되살아가야 할 초대입니다. 결국 이것이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만났던 정일우 신부님은 복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복음은 예수님을 되사는 것, 즉 사랑의 삶을 되살아 버리는 것이라고요. 예수님의 제자가 됨으로써 위로의 체험, 의미의 체험도 소중하지만 이것이 참으로 우리의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 위로의 삶을 살아갈 때 비로소 진정한 우리의 것이 되는 것 같습니다. 위로를 받기만 하고 위로를 주는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직까지 나를 자유롭게 하기보다는 부자유스럽게 해주는 위로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 기도자료 : 공관 복음 중 수난 사화 일독 (야훼종의 노래 참조)

 

 

 

<5월 9일>

 

□ 주제Ⅰ : 부활, 승천, 성령강림

 

부활 부분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공관복음 중에서 부활 부분을 읽으셔도 좋겠고, 시간이 되신다면 요한 복음의 부활사화나 승천 부분, 성령강림 부분을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슬퍼하고, 상심하고 있는 그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도 아직까지 성숙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의 미성숙함을 제거해 주시지도 않으셨습니다.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었지만 아직까지 두려움이 있었고 인간적인 나약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있는 그대로의 그들에게 나타나셨고, 있는 그대로의 연약한 모습 으로 파견받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초대하셨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그 연약함을 안고서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좌절하기도 하지만 예수님이 걸었던 그 삶을 되살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초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갈릴래아로 갔고 갈릴래아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예전에는 스승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지만 이제는 자기들끼리 예수님이 걸어가셨던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부활 사화에서 몇 가지 공통점들이 있다면 위로하시는 모습의 예수님입니다. 부활과 수난을 별개로 받아들이지 마시고 내가 예수님의 수난 앞에 어떻게 서 있었는가?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며 그곳에 계시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로 그곳에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수난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감이 들고, 피하고 싶다면 바로 그곳에 계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곳에 오시거든요.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성소를 떠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그곳으로 주님은 오셨습니다. 부활하신 곳에 있으려 하지 말고 지금 있는 그곳에서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위로하는 모습으로 오셨고, 또한 공통되는 모습은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매 미사 끝에 그 사명을 받고 일상으로 되돌아가지 않습니까?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예전에 라틴어로 미사 드릴 때는 “Ite, Missa est”라고 했지요. 신부님들도 다 잘 아시고 계시듯이 ‘Ite’는 이인층 명령어지요. 그러니까 ‘가시겠습니까?’라는 부드러운 초대가 아니라 ‘가라.’입니다. 그래서 이 사명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공통적으로 주시고 이 사명을 주시면서 우리를 다른 곳으로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속했던 공동체로 보내십니다. 주님과 베드로의 이야기를 보면 “내 양을 잘 돌보아라.”고 초대하십니다.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사랑을 나에게 보여 다오.”가 아니라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 양들한테 보여라.”는 것입니다. 여인들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네 형제들에게로 가라.”고 공동체로 되돌려 보내셨고 제자들도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다시 예루살렘 공동체로 되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은 거듭거듭 공동체로 되돌려보내십니다.

그래서 오늘 기도하실 자료는 부활과 승천과 성령강림까지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 주제 Ⅱ : 전인적인 투신

 

신앙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과 일반 직업 사회인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좋은 건축가, 좋은 의사, 좋은 변호사 등의 문맥에서 ‘좋은’ 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겠고 좋은 사람, 좋은 신앙인, 좋은 성직자와 같은 차원에서 붙일 수 있는 ‘좋은’이라는 형용사가 있는데, 그 ‘좋은’은 같은 단어이지만 그 차원은 굉장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우리가 밥을 먹을 때는 전 인격을 걸고 먹지 않습니다. 우리의 한 부분만 투자하면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좋은 의사나 좋은 변호사 좋은 건축가가 되려면 밥먹을 때 투자하는 그런 부분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 인격의 다른 부분이 더 투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는 것은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평가가 가장 인간다운 평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윤리적인 삶에서나 종교적인 삶이 성숙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좋은 의사나 좋은 변호사, 좋은 건축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나 좋은 신앙인, 좋은 사제가 되려면 어느 한 부분만이 투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상황입니다. 즉 좋은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전 존재가 투자가 되어야 합니다.

모차르트는 음악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사람이었지만 윤리적으로는 상당히 성숙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윤리적인 삶이란 한 부분만 투자해서는 되지 않습니다. 종교적인 삶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것이 저희들이 초대받은 삶이자 성소입니다.

우리가 사제로서의 신원과 정체성이 굳건한 기초 위에 서고자 한다면 위로의 체험뿐 아니라 십자가의 체험 위에도 기초해야 하고 우리의 부분적인 투신만으로 사제생활을 살아갈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 인격이 투자가 될 때 비로서 사제로서의 신원이 성립되게 됩니다. 물론 전인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과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우리의 힘만으로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은 결정적으로 하느님의 능력으로부터 오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기도생활이 필요하고 하느님께 은총을 간구하는 시간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제로서 살아가자면 위로의 순간들도 많지만 위기의 순간들, 고통의 순간들도 많이 다가옵니다. 제자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위기의 순간들이 많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과 함께할 때 위로의 체험도 많이 했지만 예수님이 잡히시고 돌아가시고 나서는 좌절과 두려움, 슬픔, 상실감, 눈물 등을 체험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성소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Shadow land>라는 영화를 보면 C. S. Louis의 이야기입니다. C. S. Louis의 부인이 죽기 전에 자기가 죽고 난 후에 남편이 느낄 고통과 상실감이 걱정이 되어 안쓰러워합니다. 그러다 죽기 얼마 전에 함께 여행을 떠납니다. 그곳에서 그 부인은 남편에게 “내가 죽고 나면 당신이 틀림없이 아주 괴롭고 고통스러워할 텐데 그 고통을 다른 시각에서 보아 주었으면 좋겠다. 그 고통은 따로,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행복의 일부분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도 일상 삶을 살아가며 많은 좌절을 겪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가정이 없고 아내도 없습니다. 그것도 결핍이라면 결핍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결핍이라기보다는 그것이 바로 우리 성소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우리 성소에 초대되어 있는 부분들을 어느 한 부분만을 선택할 것이 아니라 전체를 관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성소가 성장해 나가는데 전기가 마련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 주제Ⅲ : 생활 개선

 

마지막으로 생활개선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들이 성소를 다시 선택해야 될 상황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항상 초대되고 있는 것이 있다면 생활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기도생활이나 연례피정을 통해서 많은 것을 새롭게 느끼게 되어 감동과 감사의 느낌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가 변화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구체적인 일상 삶의 개선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만약 우리 일상의 개선이 이런 시간들을 통하여 계획되고 힘을 얻고 변화된 일상으로 되돌아가지 못한다면 추억 속의 좋은 느낌으로만 남아 있게 될 것입니다. 구체적인 우리 일상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되는 거지요.

이 피정을 마무리 하시면서 과연 내 삶의 어떤 부분에서 개선이 필요하겠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부분의 시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 피정은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생활개선에 관한 부분들, 복음의 예수님을 본받는 데 내 삶에서 가장 크게 걸림돌이 되는 부분이 어느 부분인지, 그것을 찾아내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지, 그것이 극복될 때까지 일관되고 집요하게 투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 생활개선과 아울러서 이 피정을 마무리하며 몇 가지 질문들을 드리겠습니다.

 

1. 이번 피정에서 내 마음을 가장 크게 움직인 곳이 있다면 무엇인가? 그리고 하느님은 이 움직임을 통해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가?

 

2. 이번 피정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나의 성장을 위해 도전해 오시는 부분이 있다면 어느것인가?

 

3. 일상으로 되돌아가서 이 선물과 도전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살아가고자 하는가? 그래서 이것을 위해서 어떤 결심을 하고자 하는가?

 

이 결심을 유지하고 실천해 나가기를 하느님께 간구하는 시간들을 계속 가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