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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성찰

펌글] 원자력 : 센다이 교구 방문기

by 봄날들판 2011. 8. 16.

http://www.cbck.or.kr/bbs/bbs_read.asp?board_id=K1200&bid=13007251&page=3&key=&keyword=&cat=

주교회의 의장 강우일 주교가 지진과 쓰나미로 피해를 입은 일본 센다이 교구를 4월 27일-28일 방문하였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전국 각 교구에서 일본 지진 피해 돕기 특별헌금을 모아 센다이 교구와 사이타마 교구에 전달하였으며,  이 두 교구의 주교는 한국 교우들의 관심과 배려에 감사를 표하였다.

센다이 교구 방문기
2011년 4월 27일-28일
강우일 주교

3월 중순부터 나는 지진과 쓰나미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일본 센다이 교구를 한 번 방문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내 생각은 더 굳어졌다. 한일 주교 교류모임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는 이기헌 주교님과 상의하고 부활 대축일 후에 즉시 함께 센다이를 방문하기로 하였다. 또한 우리 한국 교우들이 일본 재해 지역 주민들을 위하여 아낌없는 나눔을 실천하였기에 지진 현장을 한국 교회 측에서 누군가 한 번은 가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성주간의 피곤이 채 풀리기도 전에 서둘러 제주를 출발하여 동경에서 이기헌 주교님과 만났다. 우리는 4월 27일 아침 일찍 신칸센으로 출발하여 11시경 센다이 역에 도착하였다. 역에는 센다이 교구장인 히라가 주교님이 영접하러 나와 주셨다. 센다이 역 건물은 부분 훼손되어 수리 공사가 진행되고 있기는 했지만, 시내는 지난 3월 11일 지진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 같았고 거리에도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기차역이 시내 중심가에 있고 주변에 고층건물들이 늘어서 있지만, 모두 내진설계가 아주 잘 되어 있음을 증명하는 듯 훼손된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히라가 주교님의 안내로 먼저 주교좌성당에 들렀다. 주교좌 성당도 3월 11일 지진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으나 그 며칠 후에 일어난 여진으로 제대 뒷면 벽이 내려앉았다고 한다. 당장 미사 지내는 데는 지장이 없지만 벽의 상당한 면적에 구멍이 뻥 뚫려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센다이 교구청에는 지진과 쓰나미 피해자들을 위한 자원봉사자 센터가 마련되어 여러 지역에서 온 봉사자들이 일하고 있었고 센터 벽면에는 이곳을 다녀간 많은 자원봉사자들의 격려와 위로의 글로 메워진 걸개가 걸려 있었다. 이번 지진과 쓰나미 피해 지역을 위해 일본 각처에서 온 자원봉사자들의 행렬이 이어져 동북지역에는 현재 13만 명이 봉사에 임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히라가 주교님이 손수 운전하는 차로 교구청을 출발하여 시내에서 약 1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는 센다이 공항 쪽으로 이동하였다. 공항으로 진입하는 고속도로를 기준으로 좌측은 폐허가 되어 있었고, 우측은 고속도로가 제방 구실을 해준 덕분에 쓰나미 피해를 입지 않고 무사하였던 것 같다. 며칠 전부터 국내선은 운항을 재개했다고는 하지만, 공항 주변은 모든 시설이 다 파도에 휩쓸려 가버려 허허벌판이었고 공항 주차장에 주차해 있던 자동차들이 쓰레기처럼 뒤죽박죽이 되어 군데군데 더미를 이루며 쌓여 있었다. 자동차들 사이에는 경비행기들도 곤두박질 쳐있었고 견고한 공항 본 터미널을 제외하고 주변의 부속 건물들은 대부분 파괴되거나 못쓰게 되어 있었다. 쓰나미가 휩쓴 지 이미 한 달이 지나 물이 전부 빠지고, 몰려왔던 흙더미가 말라 먼지를 날리고 있었다. 마스크를 쓴 자위대원들이 여기저기서 교통정리를 하며 굴착기를 동원하여 쓰레기더미를 치우는 일을 하고 있었다. 트럭이나 자동차들이 달릴 때 많은 먼지가 일었고, 이 먼지에 여러 가지 안 좋은 물질이 섞여 있어 호흡기 질환을 앓는 사람들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공항을 빠져나간 다음 히라가 주교님은 센다이 항구 쪽으로 차를 몰았다. 센다이 항은 상당한 규모의 항구로 평소 많은 화물선이나 여객선이 입출항하는 곳인데 쓰나미에 밀린 수 천 톤 되는 커다란 배들이 뭍에 올라와 있었다. 이곳이 일본 자동차들이 외국으로 수출되는 기지라고 하는데 선적을 기다리던 수많은 자동차들이 이리저리 파도에 쓸려 다니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 거대한 폐차장을 방불케 했다. 그런데 이 때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느껴졌다. 어항에서 처리하던 생선들이 썩어서 나는 냄새 같았으나 혹시 희생자들의 시신에서 나는 냄새가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들었다.

항구를 빠져나온 우리는 ‘센다이’시에서 북쪽 해안가에 있는 ‘시치리가하마’라는 다른 마을 쪽으로 이동하였다. 포구가 일곱 개 이어지는 곳인데 해변 곳곳에 쓰나미를 대비한 꽤나 높은 콘크리트 보가 설치되어 있기는 했으나 거대한 파도는 그 정도는 우습다는 듯 넘어 들어와 마을을 완전히 초토화시켰다고 한다. 군데군데 남아 있는 집들도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있을 뿐 속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센다이 시내 주민들이 해수욕하러 즐겨 찾는다는 이곳 아름다운 바닷가에는 어디서 떠밀려 왔는지 커다란 컨테이너가 여러 개 모래사장 위에 나둥그러져 있었다.

바다에는 소나무들이 가득한 바위섬들이 드문드문 병풍처럼 떠 있어 평소라면 동양화의 한 폭을 감상하는 마음이었겠으나, 내륙 쪽으로는 참담한 재앙의 현장이 그대로 펼쳐지고 있어 아름다움에 대한 감흥은 전혀 솟아나지 않았다. 또 그곳 마을에는 히라가 주교님이 잘 아는 교우 치과의사가 있었는데 쓰나미에 희생되었고 치과 병원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시치리가하마’에서 더 북쪽으로 올라가 ‘시오가마(?釜)’라는 마을로 접어들었다. ‘시오가마’는 인구 5만이 조금 넘는 작은 해안 도시로 이곳도 피해가 심각하였다. 이곳에는 교우 2백여 명 정도의 본당이 있고 본당에 당도하니 성당과 부속 건물이 자원봉사자 센터로 활용되고 있었다. 이곳 본당 주임 신부는 캐나다 퀘벡 선교회 출신 선교사로 ‘라 샤펠’ 신부님이었는데 쓰나미 당일 센다이 시내로 볼일 보러 나갔다가 지진이 일어나자 본당이 걱정되어 급히 귀가하던 길에 심장마비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번 지진과 쓰나미에서 성직자로 유일하게 희생되신 분이라고 하였다. 이 신부님은 ‘시오가마’ 마을을 덮친 쓰나미에 본당이 무사한지 염려가 되어 서둘러 달려오시다 변을 당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소임지를 끝까지 지키려는 선교사의 숭고한 최후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오가마 성당은 바닥이 다다미로 되어 있어 자원봉사자들의 숙소로 사용하고 있는데 한쪽으로 침구가 가득 쌓여 있었고 또 다른 쪽으로는 곳곳에서 보내온 비상용 식량과 식재료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였을 때 자원봉사자들은 모두 일하러 나가고 센터장을 맡고 있는 본당 교우 대표와 몇 사람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원봉사자들이 나가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묻자, 피해 지역이 워낙 광활하고 피해 상황이 너무 심각하여 대단한 일은 하지 못하고 집집에 쌓여 있는 진흙더미를 치우고 가족들에게 소중한 물건이나 아직 쓸모 있는 가재도구를 챙겨주는 정도의 일 밖에 못한다고 하였다. 그동안 추운 날씨가 계속되어 자원봉사자들이 성당에서 숙식을 하는데도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다고 하였다. 그래도 주민들은 자원봉사자들이 재앙을 입고 허탈해 있는 자신들 곁에 찾아와서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의지가 되는지 모른다고 하였다. 어떤 젊은 여성 자원봉사자는 쓰나미 피해 지역에서 일하는 중에 너무 참담한 광경을 계속 접하다보니 심리적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우울증에 빠져 센터에서 귀가 조처를 한 경우도 있었다고 하였다.

‘시오가마’를 떠난 우리는 거기서 다시 북쪽으로 3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이시노마끼’라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히라가 주교님은 먼저 우리를 ‘이시노마끼 시’ 전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히요리’ 공원으로 안내했다. 공원은 지대가 높아서 그런지 벚꽃이 한창이었다. 그러나 벚꽃의 화사한 아름다움과 너무나 대조적인 참담한 광경이 눈 아래로 펼쳐져 있었다. 시가지 전체가 폐허가 되어 있는 모습이었다. 시가지가 제일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여러 사람이 와서 병에 국화를 여러 송이 꽂아 놓았다. 쓰나미 희생자들에 대한 조의의 꽃다발인 것 같았다. 그 꽃병 옆에서 한 젊은 여성이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훌쩍이며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한 달이 지났지만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 친지의 기억에 아직도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공원에서 내려다 본 ‘이시노마끼’ 시내는 한마디로 쑥대밭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륙에서 바다쪽으로 꽤 폭이 넓은 강이 흐르는데, 쓰나미는 이 강을 거슬러 올라가 단숨에 내륙 깊은 곳까지 초토화시킨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강 양쪽은 수산업 공장들이 늘어서 있는데 그곳에서 가공하던 생선들이 부패해서 내는 냄새인지 아주 역한 냄새가 온 시가지를 덮고 있었다. 이곳에도 큰 배들이 여러 척 뭍에 올라와 있었다. 공원에서 내려와 시내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철저히 파괴된 모습이었다. 물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지를 실감하게 하는 광경이었다. 작은 어선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는 건물 지붕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주민들이 여기저기서 자기 집 근처 쓰레기 더미를 들치며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방송에서 들으니 주민들이 가족들의 옛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사진첩과 앨범을 제일 찾고 싶어 한다고 했다. 다른 가재도구야 다시 장만하면 되지만 잃어버린 자녀나 부모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사진 한 장이 지금 그들에게는 제일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 것 같다. 어떤 주민들은 폐허를 들치다 피곤한지 넋을 잃은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는 이들도 있었고 어떤 주민들은 두 셋이 모여 앉아 쉬고 있기도 했다.

시내를 대충 살핀 다음 비교적 마을 제일 높은 위치에 자리 잡은 ‘이시노마끼’ 본당을 찾았다. 부속 유치원이 달린 신자 130명 정도의 작은 본당인데 역시 젊은 자원봉사자들이 여럿 와서 진을 치며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하였다. 본당 주임인 도이 신부님을 만나니 그도 친척과 친지 여럿을 잃었다고 했다. 그리고 아직 매일 새로운 시신들이 여러 구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하루에 한 번 시체 안치소를 찾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얼굴을 확인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를 올리고 있다고 하였다.

해가 거의 저물었기에 우리는 이시노마끼 시내에서 유일하게 남은 작은 여관에서 여장을 풀었다. 이곳도 비교적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아무런 피해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미 저녁이라 요기를 할 수 있는 식당이 없는지 여관 주인에게 물으니 한 곳을 알려주었다. 여관에서 그리 먼 거리가 아니어서 도보로 걸어갔다. 해가 진 다음이라 기온이 갑자기 내려갔고 으슬으슬 추워지니 따뜻한 곳에서 따뜻한 음식이 그리워졌다. 집들은 다 침수되어 1층은 못 쓰게 된 것 같았고 마을 주민들은 대부분 피난을 나간 듯 거리는 한산하여 인적이 드물었다. 여관 주인이 알려준 식당에 들어서니 의외로 이곳은 손님들이 북적였다. 열린 식당이라곤 이곳밖에 없으니 모두 이곳으로 몰린 것 같았다. 그나마 이곳 한 곳이라도 식당 영업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몰랐다. 손님 대부분은 ‘이시노마끼’로 자원봉사를 온 젊은이들 같았다. 종업원에게 들으니 이곳 식당도 우리가 도착하기 나흘 전에 비로소 영업을 재개했다고 하였다. 며칠 더 일찍 왔더라면 밥도 못 얻어먹을 뻔했다.

저녁 식사를 하며 히라가 주교님과 지진 당일 날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나는 지진이 일어난 3월 11일 히라가 주교님이 어디서 지진을 체험했는지 물었다. 히라가 주교님은 동경에 볼일이 있어 신칸센을 타고 내려가던 중이었다고 했다. 오후 3시 가까웠을 때 달리던 신칸센 전철이 갑자기 크게 흔들리며 급정거를 했는데 터널 속이었다고 하였다. 전동차는 멈추어 섰고 정전이 되어 완전히 캄캄한 굴속에 갇혀버렸다고 하였다. 얼마 동안이나 굴속에 갇혀 있었느냐고 묻자 이튿날 아침 9시 경에나 나올 수 있었다고 하였다. 무려 18시간을 칠흑 같은 암흑 속 전철 안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그 오랜 시간 굴속에 갇혀 있다는 생각만 해도 나는 끔찍한 생각이 들었다. 그 오랜 시간을 어떻게 견뎠느냐고 물었더니 다른 뾰족한 수도 없고 모두 그냥 조용히 기다렸다고 한다. 차장이 신칸센 전철과 터널은 지진에 대비하여 아주 강하게 설계되어 있으니 절대로 안심해도 된다는 안내방송을 여러 차례 했고 몇 시간 지나자 주먹밥 한 개와 주스 한 개를 모든 승객들에게 배부하였다고 한다. 외부에서 급히 조달해 온 것이었다고 한다. 다만 건강에 이상이 생긴 승객이 한 명 있어 승객 중 의사가 있으면 도움을 달라는 방송이 한 차례 있었을 뿐 다른 승객들은 모두 이튿날 대책반이 도착할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렸다고 한다. 위기에 대응하는 일본인들의 침착함에 새삼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만일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어떤 상황이 전개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이 되어 철도회사 직원들의 안내로 일단 터널 밖으로 걸어 나온 승객들은 철도회사 측에서 마련한 여러 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동경까지 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히라가 주교님은 동경 행을 포기하고 돌아와 버스와 택시를 여러 차례 갈아타며 겨우 센다이 교구청으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한편 교구청에서는 지진 후에 주교님과 여러 차례 연락을 시도하였으나 통화가 되지 않자 한 때 주교님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었다고 한다.

히라가 주교님이 미리 예약해 놓은 이시노마끼의 여관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재앙으로 폐허가 된 땅에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니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다. 아침식사는 여관에 미리 6시 45분에 먹을 수 있도록 예약해 두었다. 그런데 놀란 것은 이 여관에 묵은 대부분의 숙박객들이 우리보다 먼저 식당에 들어와서 그 이른 시간에 이미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작업복 차림이었고 조반을 마치자마자 곧 일터로 출발하는 자원봉사자들이었다. 이들은 마치 매일 아침 일터로 출근하는 노동자 같은 담담한 표정으로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고 있었다. 일본의 자원봉사 문화가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였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일본은 지난 고베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큰 재앙을 입은 이재민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찾아온 선의의 시민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지면서 자원봉사 문화가 크게 진작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 동북지역의 지진과 쓰나미 재해로 말미암아 일본인들은 그보다 한 단계 더 크게 성숙된 자원봉사자들의 동참과 협력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런 천재지변의 외적인 재앙 자체만 보면 우리는 왜 하느님이 이런 비참한 재앙을 허락하시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부조리를 느낀다. 그러나 또 다른 시각에서 보면 하느님께서는 이런 재앙을 통하여 예상치 못한 아주 큰 은총을 우리에게 마련해 주고 계심을 느낄 수 있다.

일본 NHK방송이 이 양대 지진 피해에 앞장서서 자원봉사대를 조직하고 관리한 한 인사와 나눈 인터뷰를 보았다. 그는 이 두 지진을 통하여 일본인들의 자원봉사 의식이 크게 한 단계 도약한 것 같다고 표현하였다. 일본인들은 평소 남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하여 다른 사람 일에 참견하거나 관여하지 않는 것이 상례이고 또 개인주의가 극도로 발달한 현대에 이르러 시민들은 모든 ‘인연’을 상실하는 ‘無緣사회’, 주변 사람과의 관계를 상실하는 외로운 사회에 살고 있다고 자평한다. 그런데 최근에 일어난 두 번의 재앙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고 서로 간에 연민과 도움을 주고받는 새로운 지평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싸늘하게 식어가던 일본사회에 따뜻한 인간미와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싹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과연 끔찍한 재앙 속에서도 우리가 예기치 못한 은총을 내려주시는 분임을 새롭게 깨닫게 된다.

4월 28일 아침 8시 경 우리는 이시노마끼의 여관을 출발하였다. 자동차 안에서 히라가 주교님에게 우리가 직접 가져 간 한국 교우들의 헌금 2천여만 원(일화 150만 엔)을 전달하였다. 이미 열흘 전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사무처에서는 전국 각 교구에서 일본 지진 피해자들을 위해 모금된 특별헌금 13억 원을 송금하였다. 11억 원은 센다이 교구로, 2억 원은 사이타마 교구로 송금한 바 있었다. 이에 두 교구의 주교님들은 한국의 모든 교우들의 관심과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하는 뜻을 표하는 편지를 보내 왔었다. 그 후에도 한국의 몇 교구에서는 추가로 모금된 액수가 있어 다시 송금하고 그 중 일부를 이번 방문에 직접 센다이 교구로 들고 간 것이다. 히라가 주교님은 한국 교우들의 아낌없는 협력과 사랑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시노마끼를 출발하여 우리가 향한 곳은 ‘미나미 산리꾸’(南山陸)라는 해안도시였다. 여기서도 끔찍한 광경이 계속되었다. 해안가에는 모든 집들이 기초만 남기고 사라져 있었고, 고기잡이배들이 논 한가운데 올라와 있었다. 강줄기를 타고 떠밀려 온 것 같았다. 자동차들의 무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자동차들은 어쩐 일인지 도색한 것도 다 벗겨지고 철판이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는데 마치 부서진 지 수 십 년이 지난 것 같은 모양이었다. 가는 곳마다 이런 자동차들의 무덤을 보며 못 쓰게 된 자동차가 몇 만 대도 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철저히 파괴된 해안선 마을들이 무려 500킬로미터에 걸쳐 펼쳐져 있다고 한다. 모든 것이 철저히 부서지고 뒤엉킨 쓰레기의 마을들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지대가 상당히 높은 곳도 2층은 물에 잠기지 않았으나 1층은 벽이 다 뚫려있었다. 바닷가이지만 비교적 높은 숲지대에 뒤엉켜 있는 쓰레기와 물에 젖어 색깔이 변한 나무줄기를 보니 쓰나미의 파도가 얼마나 높이 밀려왔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어떤 곳은 지표면에서 30미터도 훨씬 더 되는 곳의 나뭇가지도 물에 잠겨 변색되어 있었다. 평지에서는 굴착기로 쓰레기 더미를 치운다고 하지만 산악 지역의 숲속 구석구석까지 널려 있는 쓰레기는 그럴 수도 없고 모두 사람이 들어가 치우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히라가 주교님도 기막혀 하며 이런 쓰레기를 전부 치우고 복구하는데 30년이 걸릴 것이라는 이야기도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산자락 아래서는 자위대 장병들이 줄을 서서 밀려온 흙더미를 삽으로 들치고 있었다. 아직도 시신을 찾고 있는 모습이었다. 오늘이 지진 후 49일째인데 어떤 젊은 부부는 행방불명이었던 어린 딸의 시신을 오늘 찾아서 그나마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감사하는 모습이 방송에 나왔다.

‘미나미 산리꾸’를 떠나 더 북상한 우리는 ‘게센누마’(氣仙沼)라는 마을로 향하였다. ‘게센누마’로 향하는 도중 기차 철로가 끊어지고 여기 저기 흩어진 모습도 보였다. 한 곳에는 철교가 완전히 유실되고 교각만 덩그렇게 남아 있었고 기차가 산 속으로 들어가는 터널만 외롭게 남아 있었다. ‘게센누마’시에 들어서니 사방이 화재로 새카맣게 탄 흔적이 보였다. ‘게센누마’시는 쓰나미가 발생하였을 때 정유시설의 기름 탱크가 터져서 흘러나온 석유에 불이 붙어 배들이 정박한 부두 전체를 사흘 동안 불태웠던 곳이다. 여기서도 몇 천 톤짜리 배들이 육지에 올라와 앉아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불에 타서 검은 숯덩이가 되어 있었다. 도저히 다시 수리해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여기서도 생선 썩는 냄새가 진동을 했다. 어제 저녁 뉴스에서 동북지역 어민들의 고기잡이배 90%가 못쓰게 되었다고 하는 보도를 들었다. 게센누마 시내 안쪽으로는 건물들이 형태는 유지하고 있으나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하지 않으면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래도 이곳에서는 주민들이 주변 정리를 하기 위해 팀을 이루며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또 임시 상가도 하나둘 영업을 하기 시작하는 생기있는 모습도 보였다. 쓰나미가 밀려들어 젖었던 다다미를 집집마다 길가에 내어놓은 것도 보였다. 바닷물에 한 번 젖은 다다미는 말려도 다시는 사용을 할 수 없고 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 많은 쓰레기 더미를 도대체 누가, 언제, 어디에 가져다 버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곳 게센누마의 성당도 높은 지대에 있어 쓰나미 피해를 입지 않았다. 시간이 없어 성당에 들리지는 못했으나 멀리서 보니 성당 입구에 성모상이 서있고 게센누마 동네를 내려다보고 계셨다. 왜 동북 지역의 성당들이 한 군데도 쓰나미에 휩쓸리지 않았는지 신기했으나 나중에 설명을 듣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 동북 지역은 옛날에도 쓰나미가 밀려온 적이 있었고 그 때 선교사들도 희생된 적이 있었기에 이 지역 선교사들 사이에는 바닷가 마을에는 절대로 성당을 낮은 곳에 지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는 것이다.

‘게센누마’에서 우리는 ‘리꾸젠 타까다’(陸前高田)라는 곳으로 향할 예정이었으나 ‘게센누마’까지 오는 도중 여러 곳의 도로가 끊어져 있어 임시로 만든 비포장 도로로 우회하지 않을 수 없어 예상외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고속도로도 지진으로 말미암아 길 가운데 금이 가고 함몰된 부분이 많아 속도를 낼 수 없었다. 히라가 주교님도 우리에게 ‘리꾸젠 타까다’ 마을을 구경시켜 주고 싶어 하였으나 결국 시간이 부족하여 그러지 못하고 센다이 교구 피해지역 방문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히라가 주교님은 다음 기회에 꼭 다시 리꾸젠 타까다 지역도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하며 이번 방문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센다이에서 동경으로 오는 신칸센에서 도중의 ‘후꾸시마’ 역을 통과할 때 ‘후꾸시마’ 시내 거리를 유심히 살폈다. 그런데 거리가 어쩐지 유령도시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민들이 바깥나들이를 전혀 하고 있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후꾸시마’시는 후꾸시마 원자력 발전소가 있는 곳에서 적어도 50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이다. 그럼에도 시민들은 원전 사고로 인한 방사능 누출을 염려하여 외부 공기와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후꾸시마 뿐 아니라 그 인근 지역 전체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일본인들은 이번 동북지역의 지진과 쓰나미 피해만으로도 엄청난 충격을 받았지만, 동시에 쓰나미로 인한 원전 폭발과 방사능 누출로 새로운 형태의 재해를 경험하고 이중 삼중의 충격에 빠진 것 같다.

일본은 지금 후꾸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사고로 인하여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양분되고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예측하는 ‘토오까이(東海)지진’의 예상 진원지역에 하마오까 원자력 발전소가 있고 일본 중부전력회사는 정기 검사 중인 이 원전 3호기를 7월에 재개한다는 방침이다. 이를 두고 한 쪽에서는 지금 당장 원전 운전을 그만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또 다른 한 쪽에서는 정지할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민들 사이에서도 원전에 대한 의견이 찬반으로 엇갈리고 있다. 일본이 직면하고 있는 원전 문제는 강 건너 불이 아니다. 원전의존율이 더 높은 우리나라에도 직결되는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도 이제 원자력 발전에 대해 좀 더 진지하고 근본적인 성찰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되었다고 곱씹으며 귀국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