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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영성 영어 블로그 번역

사랑 속에 태어나다 : 대림과 입양에 관해

by 봄날들판 2015. 3. 2.

오랜만에 마음 잡고 블로그를 다시 시작해 봅니다. 

외국 블로그 글 번역 시리즈 1

페터 회의 소설 <경계선에 선 아이들>을 읽으면

어떤 의미에서든 부모에게 어떤 의미에서든 소외된 아이들의 이야기가

참 마음 아프게 이어진다.

그래서 그런지 우연히 이 글을 읽고 더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문장을 스스럼 없이 말하기까지 과정이 참 쉽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원문은 jesuitpost.org

 

Born in Love: On Advent and Adoption

사랑 속에 태어나다 : 대림과 입양에 관해

에릭 임멜 SJ(예수회원)

 

나는 사랑받고 있다. 고로 내가 여기에 있다.

모든 것을 다 담은 책이 있다. Everyone Poops(누구나 똥 싼다)에는 굉장히 재미있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아이들이 자신의 몸에서 부모에게 냄새나고 속이 울렁거리는 선물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깨달을 무렵 그들에게 안도감을 준다. 다른 책에는 배꼽은 어디 달렸는지, 불도저와 학은 하루를 보내고 나서 어떻게 쉬는지, 자벌레와 여우 부인은 무얼 먹고 사는지, 원숭이가 얼마나 호기심이 많은지 이야기한다. 나의 경우, 내가 기억하기로는 내가 세상에서 처음 깨달은 것은 내가 입양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친모를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 친모의 이름은 알고 있다. 그분의 이름은 낸시. 낸시는 딱 한 번 나에게 시카고 컵스 티셔츠를 우편으로 보내 주었다. 어쩌면 낸시는 시카고, 지금 내가 사는 곳에 사는지도 모른다. 낸시는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이다. 내 말은 시카고가 아니라 이 세상을 말한다. 그녀는 도서관 한구석에 앉아 있는 예수회원, 써야 하는 논문도 읽어야 하는 책도 미루어 둔 채 그녀를 생각하는 나를 세상에 있게 한 분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입양이 그것과 연관된 모든 이에게 비교적 쉬운 일이었으리라 여겼다. 나의 양부모는 식구 수가 좀 더 많아지기를 원했고 그래서 그 방법으로 입양을 택했다. 입양 약속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루어졌다. 1982617일 아버지는 내가 막 나오는 길이라고 전화 연락을 받았다. 그때 아버지는 달리기를 하고 돌아온 길이었다고 한다. 얼마 안 있어 나는 롤라 드라이브 2701번지에 있는 안락한 유아용 침대에 뉘어졌다. 나를 세상에 낳아 준 여인의 품에서 벗어나 내 부모의 집으로 온 것이다. 나는 지금 그들의 아들이다. 입양한 세 아이 가운데 둘째이고, 그들의 아들이다. 쉬울 수밖에.

부모의 무릎에 앉아 책을 읽을 때 나는 내가 입양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사랑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간단했다. ‘너는 사랑받고 있어. 왜냐하면 너는 입양되었으니까. 그리고 너는 입양되었기 때문에 사랑받고 있어.’ 나는 그 사실을 뿌듯해했다. 자신이 특별한 존재로 느껴졌다. 사랑과 입양은 떼려야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한번은 2학년 때 같은 반 경쟁자가 나를 고아라고 불렀다. 분명 입양되었다는 자부심을 꺾어버리려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그 말에 나는 마음이 아프긴 했지만(나는 지금도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 마음을 이겨내는 일은 참 쉬웠다. 나는 입양되었으니까. 그리고 사랑받고 있으니까.

***

 

예수회원이 된 첫 해 대림이었다. 정이 많고 배려가 깊은 나이든 신부님이 침묵 피정을 삼일 간 지도해 주셨다. 첫 대화에서 신부님은 그냥 보기에는 별 아픔거리가 되지 않는 질문을 주셨다. ‘당신은 어디에서 왔습니까?’ 착한 새내기 수련자답게 나는 공동체 식당에 앉아 그 질문에 조용히 머물렀다. 지나온 삶의 이야기를 되새길수록 내가 온 곳이 상상 속에 떠올랐다.

내 삶이 눈앞에 펼쳐졌다. 쿠키 몬스터 생일케익, 성탄절이면 할머니댁 지하실에서 사촌들과 모두 뒤엉켜 씨름을 하던 일, 6학년 때 첫 여자 친구와 도깨비집에서 얼떨결에 손을 잡은 일(좀비는 그녀만큼 내 가슴을 뛰게 하진 못했다.), 8학년 때와 고등학교 졸업(그리고 미처 보내지 못한 감사 편지들), 대학교에 가려고 세인트 루이스까지 8시간 동안 운전한 일, 어른이 된다는 고통과 기쁨, 첫 번째 직장, 영수증과 학자금 대출금, 부끄럽게도 돈 좀 보내 달라고 집에 전화한 일, 그리고 물론 성소 식별도 있다. 그날 저녁 수련소 식당에 있게 된 일도 식별에서 이어진 것이다. 이런 곳에서 나는 왔다.

그렇지만 그러고 나서 나는 성경을 펼쳤다. 성경은 확실히 다른 책이기도 하지만 또한 어렸을 때부터 접하던 책이기도 하다. 나는 마리아라는 처녀의 이야기를 읽었다. 불현듯 깨달음이 왔다. 나는 늘 내가 입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말이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게 있었다. 내가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

 

 

어느 때인가에 이르러 그녀는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당시의 진짜 마음을 나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이러하다. 나는 실수로 생긴 아이였다. 얼마 가지도 못한 사랑에서 생긴 존재였다. 그 사랑은 적어도 나를 기다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바라거나 계획을 한 아이가 아니었다. 나는 원치 않는 존재였다. 분명 두려움, 혼란, 아픔, 분노, 어두움이 있었으리라. 그렇지만 그녀는 아홉 달 동안 나를 배 속에 품었다. 나에게 양분을 주었다. 나에게 자기 자신을 주고 그리고 나를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 나는 두려움이 믿음에 길을 열어 주었다고 믿는다. 혼란이 확신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고 믿는다. 아픔이 상처 치유로 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고 믿는다. 분노가 사랑으로 가는 길을 냈다고, 어두움이 빛으로 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고 믿는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그녀에게 말할 때 나는 상상력 속에서 마리아가 놀라서 당황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약혼자를 꿈꾸고 있었고 그와 백년해로 하기를 바랐다. 아이를 키우고 열심히 일하고 밤이면 팔베개한 따뜻한 품에 안기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그 순간 모든 게 변했다. 예수는 뜻밖의 아기였으며, 아마도 한동안은 원치 않는 아이였을 것이다. 시인 드니스 레버토브가 썼듯이 마리아가 아직 거절할 수 있던 때, 그때는 아무도 말할 수 없었네. 숨을 멈춘 채 영은 기다리네.”

 

하느님은 기다리셨고 마리아는 사랑으로 응답하였다. 마리아는 모든 일을 겪으면서도 그 사랑 속에 머물렀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가능케 하셨다. 우리가 기념하는 것도, 기억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그녀는 나를 사랑했다. 고로 지금 내가 여기 있다. 지금의 내가 있다. 고로 그녀는 나를 사랑한다. 마리아에게 신앙이 있었기에 예수님은 살 수 있었다. 예수님과 나는, 남자 아기였고 원치 않는 아이였던 우리는 어둠 속에서 태어났으나 사랑으로 입양되었다. 낸시가 혹시 이 글을 읽는다면 그녀가 알기를 바란다. 그녀 역시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녀가 이것만은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녀는 용감한 사람이었으며, 내가 감사해하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