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냐시오 성인과 함께하는 31일 여정 번역

제22일 : 부정적인 감정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기

by 봄날들판 2018. 1. 22.
제22일 : 부정적인 감정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기


부정적인 감정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기

Finding God in Negative Emotions


이냐시오 영성에서는 위안(consolation)의 역할을 올바르게 강조한다. 하지만 최근에 나는 부정적인 감정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을 더 많이 생각하곤 했다. 여기서 나는 우리가 슬픔, 화, 실망, 아니면 다른 강한 감정을 느낄 때 하느님이 위안을 주시고 달래 주시고 용기를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신다는 뜻이 아니다. 그 말은 또한 맞기는 하다. 그렇지만 여기서 나는 부정적인 감정, 다시 말해 좋지 않은 감정이 이미 하느님의 현존을 가리키는 경우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 세 가지 예가 있다.


의로운 분노. 분노는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배운 사람이 많다. 그렇지만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이 감사하다. 그는 “정당한 분노는 그것이 올바른 사람에게 올바른 일에 대해 올바른 정도로 향한다면 미덕이 된다.”라고 했다(니코마코스 윤리학 IV.5). 사회적 불의의 예를 떠올려 보자. 태풍 후의 기아, 구조적 인종 차별, 사회는 부유한데 한쪽에는 아주 가난한 사람이 있는 것 등등 말이다. 분노는 불의를 알아차리는 데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깨달음의 첫 순간이 될 수 있다. 아모스서에서 하느님은 ‘힘없는 자를 돈으로 사들이고 빈곤한 자를 신 한 켤레 값으로 사들인’(아모 8,6 참조) 것에 대해 이스라엘의 부유한 사람들에게 분노하신다. 우리는 우리의 분노를 키워 나가서는 안 된다. 결국 분노는 사랑으로, 연민으로, 인내심으로 변화해야 한다. 불의를 일으키거나 불의를 범한 사람에게라도 말이다. 그렇지만 분노는 사회적 불의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느님이 우리를 이끄시는 첫 번째 건강한 감정이 될 수 있다.

슬픔. 물론 불의의 원인이거나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것이 타인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일 때가 종종 있게 마련이다. 슬픔과 통회는 처음에는 무척 괴로울 수 있다. 고등학교 때 학교 도서관에서 있은 일이다. 나는 미식축구공을 가지고 빈둥대면서 있다가 친구에게 가볍게 던졌다. 그런데 공이 샹들리에로 날아가는 바람에 샹들리에가 깨지고 말았다. 여기저기 유리가루가 떨어질 정도였다. 너무나 부끄러워서 나는 제 발로 교무실로 가서 선생님한테 내가 한 일을 털어놓았다. 다행히도 선생님이 이해해 주었고 ‘샹들리에를 깬 여학생’이라는 꼬리표를 영원히 달게 될까 봐 처음에 두려워한 일은 다행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쁜 행동을 저질렀을 때 슬픔과 후회가 든다면 그것은 좋은 감정이다. 진정으로 슬퍼하면 다른 사람에게 “미안합니다.”라고 말하게 된다. 슬픔을 느낄 때 우리는 회심과 겸손함, 그리고 결국은 용서로 이끌린다. 그럴 때 슬픔은 이미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활동을 드러내는 표징이 된다.

그리워하기.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 있을 때, 우리는 그의 존재를 무척 그리워한다.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슬퍼한다. 서로 진지하게 체험을 공유하고 나서 그 사람들과 함께 있던 공동체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가족과 명절 연휴를 보내고 나서 우울해할 때처럼 말이다. 누군가를 그리워할 때면 마음에 큰 구멍이 난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그리움의 감정은 또한 많은 돌봄과 상대방과의 연결에 대한 표징이기도 하다. 그리움은 이미 사랑을 가리킨다. 서로 다른 주에서 멀리 떨어져 살기에 나는 엄마와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 엄마가 여전히 그립다. 그러면서도 그리워할 만큼 사랑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안 계신다고 느껴질 때, 위안이 메마름으로 변했을 때, 그런 때에 하느님은 여전히 그분이 돌아오시길 바라는 그 마음속에 존재하신다. 하느님을 그리고 하느님 안에 연결되어 있는 다른 이들을 갈망하는 바로 그 마음에서 하느님을 알 수 있다. 그리움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곧 우리 사랑의 가장 깊은 근원이자 대상이신 분을 가리켜 준다.


당신은 부정적인 감정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한 경험이 있는가?